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효세자 (문단 편집) === 왕세자가 되다 === >보양관 좌의정 이복원과 우의정 김익이 상소하기를, >“생각하건데, 우리 전하께서는 경사스러운 복록(福祿)이 끝이 없어서 큰 운수가 바야흐로 도래하시니, 이에 길한 달과 아름다운 날에 원자를 낳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근본은 비록 정해졌지만, 예의(禮儀)를 아직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위로 두 분 [[정순왕후 김씨(조선)|자성]](慈聖)을 모시고 효도를 다하고 뜻을 받들지만, 자전(慈殿)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면 성대한 예식을 빨리 거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원자의 지혜와 생각이 점차 깨우쳐지고 호기심이 장차 싹트게 될 터인데, 빈사(賓師)의 직임과 강독(講讀)의 관직을 가지런하게 숫자대로 갖추고 아침저녁으로 좌우에서 모시게 한다면, 어찌 미천한 신하 한두 사람이 1달에 1번 만나서 가르치는 것보다 좋지 못하여 아무런 성과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무더위가 물러가고 천기가 한층 새로워지니, 때가 바로 만물이 결실을 맺는 초기에 속할 뿐만 아니라, 또 생신을 경하(慶賀)드릴 성절(聖節, 임금의 생일)이 다가옵니다. 만물이 형통하고 시절이 아름다운 기회에 경사를 축하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므로, 세자의 칭호를 정하고 책봉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시기와 의미를 가지고 논할 때 어찌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문제]](漢文帝) 원년에 여러 신하들이 태자(太子)를 미리 세울 것을 청하자, 문제는 그것을 옳게 여겼습니다. 주자는 이것을 《강목(綱目)》에 기록하여 후세의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등극하신 지 이미 8년이 되었습니다. 문제의 고사에 비교할 때 왕세자를 미리 세운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밝은 명령을 내려 빨리 책봉 예식을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영의정 정존겸, 영부사 김상철, 판부사 서명선, 이휘지, 홍낙성이 잇달아 차자(箚子, 간단한 상소문)와 상소를 올려 책봉예식을 거행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비답하기를, >“이것은 지극히 중대한 나라의 예법이다. 경등이 들어와서 직접 아뢰도록 해라.” >하였다. 이리하여 시임(時任), 원임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 예조 당상관, 경재(卿宰, 재상), 여러 승지들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선정전에 나아가서 여러 신하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같은 목소리로 아뢰기를, >“오늘 신 등이 서로 이끌고 등연(登筵)한 것은 바로 온 나라 사람들의 똑같은 심정에서 나온 소청입니다. 전하께서 지금까지 허락하기를 꺼리는 것은 진실로 큰 복을 아끼려는 뜻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자의 의젓한 용모가 일찍부터 나타나고 있으니, 금일의 책봉예식도 또한 늦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실로 종묘사직의 큰 계책이다. 내가 어찌 허락하기를 꺼리겠는가?”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원자를 세자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1784년 7월 2일 결국 상상임신임을 깨달아 [[화빈 윤씨]]의 산실청도 철거하고(이재난고) [[의빈 성씨]]는 윤3월 20일 딸도 낳아 1남 1녀의 가정을 이루게 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조의 나이가 이미 30대라 신하들이 많이 초조했는지, 아직 3살(만 1세)임에도 "왕세자 책봉이 늦어지고 있다. 빨리 왕세자로 책봉하라."고 모두가 정조를 설득했고, 본래는 좀 더 늦출 생각이었던 정조는 한동안 망설였지만 결국 신하들의 뜻이 확고한 데다 스스로도 나이가 있음을 알았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수빈 박씨]]가 낳아 당일에 원자정호를 한 순조도 10살에 왕세자가 된 데다 어쨌든 받아들인 건 정조니, 일찍 할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왕세자의 이름(名)을 정하였다. 고례(古例)에 자(字)를 정하는 것은 관례(冠禮) 뒤에 행하였으므로, 승지 이시수가 전례를 들어다가 의견을 개신하고 품신(稟申, 상소)하니 임금이 그 의견을 옳게 여겼다. >1784년 7월 6일 이후 4일이 지나 문효세자의 이름, 정확히는 휘를 정하였다. 이를 보아 책봉되기도 전에 죽은 갓난아기 왕자녀들은 이름 짓기 전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효세자의 책봉식은 정전인 [[창덕궁 인정전]]에서 치렀으나 이 자리에는 문효세자 본인이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책봉례와 수책례를 별도로 치르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문효세자책례계병>에도 두 예식의 모습이 각각 묘사되었다. 이렇게 별도로 치른 이유는 왕세자가 당시 22개월로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책봉 당일인 1784년 8월 1일 인정전에서 임금이 대신들을 모아두고 왕세자 책봉을 선포하는 예식을 치렀다. 이어 임금의 사자들이 책봉 교명과 책인을 가지고 동궁 중희당으로 이동한다. 왕세자는 책봉례 동안 중희당에서 대기하다가 사자들이 가지고 온 교명과 책인을 인도받는데, 이를 수책례라고 한다. 하지만 문효세자는 수책례에서 교명과 책인을 받는 역할은 세자시강원의 궁료들이 대신 맡았다고 한다. 아기 왕세자는 이후 사배례를 올렸다. 문효세자 책봉례 전날 예행연습을 했는데 정조는 중희당에서 이 예행연습을 참관했다. 덧붙이자면 의궤는 책자고 책례 계병은 병풍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