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효세자 (문단 편집) === 축복받은 탄생 === [[1782년]](정조 6년) [[9월 7일]], 새벽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태어났다. 이날 밤 갑자기 한 줄기 붉은 빛이 침실을 비추었는데 마치 해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고 한다. 정조는 나이 30살이 다 되어가도록 자식이 없었는데 [[효의왕후]]는 불임인데다가 정조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원빈 홍씨]]는 입궁한지 1년만에 죽었으며, [[화빈 윤씨]]의 [[상상임신|(상상)임신]] 소식을 듣고 설치한 산실청은 30개월이 되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한편 [[의빈 성씨|궁인 성씨]](宮人成氏)를 총애해 2차례 임신했지만 유산하고 3번째 임신 때 겨우 출산에 성공한 것이다. >왕자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들을 불러보고 하교하기를, >“궁인 성씨가 태중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대신과 원임대신을 불러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나라를 돌보시어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1735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1782년 9월 7일 정조는 문효세자가 태어나자 "[[궁녀]]가 아들을 낳으면 [[후궁]]으로 삼는다"는 관례에 따라, 궁인 성덕임을 소용(정3품)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또한 정조는 30살이 되어서야 처음 자식을 얻은데다, 그 아이가 아들이라는 것에 무척 기뻐했다.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9월에 영조와 정조가 태어났는데 이 달에 아들이 태어나다니 대단한 길조'라고 평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없었는지 20개월째 철거되지 않은 화빈 윤씨의 산실청을 놔두고 윤씨가 아들을 낳기를 기다렸다.[* 아마 미천한 궁녀 출신인 [[의빈 성씨]]와 간택후궁이던 [[화빈 윤씨]]의 신분차이 때문에 그런 듯 하다. 만약 의빈 소생의 왕자를 후계자로 정한 후 화빈이 아들을 낳아버리면 양반가 규수를 어머니로 둔 왕자를 제치고 궁녀를 어머니로 둔 왕자가 후계자가 되는 것이니, 분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듯.]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조가 이 왕자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 늦은 나이에 본 첫 자식에다 가장 사랑하는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경사라고 기뻐하는 모습이 나온다. 막상 신하들의 생각은 달랐는데 이미 화빈 윤씨는 회임을 발표한 지 [[상상임신|20개월이나 지난 뒤에도 출산 소식이 감감무소식이어서]] 신하들은 윤씨에 대해서는 기대를 버렸고[* 아이가 잉태되고 태어나기까지의 시간이 대략 9개월 정도인데 산실청을 설치한 지 7-8개월 정도 지났으면 몰라도 20개월이라는 점에서 [[답이 없다]]고 느꼈던 듯.], 만일 윤씨가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이미 장자가 있는 상태에서 [[복성군]]이나 [[영창대군]] 같은 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에 [[의빈 성씨|소용 성씨]]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을 가지게 된다.[* 모친의 신분이나 적서로 왕위계승을 정했던 조선 초기와는 달리 조선 중-후기만 가도 왕실의 손이 줄어들기 때문에 장자계승이 원칙처럼 되어버린다. 더군다나 이쪽은 적자와 서자라는 차이도 없는 같은 서자인 상황이라 장자인 의빈의 아들에게 힘을 더 실었던 듯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