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악영향 (문단 편집) === 식문화 === 문화대혁명은 [[중국 요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궁중예식을 기록한 문헌 다수가 [[문화대혁명]] 때 소실되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만한전석]]'''으로 이것이 소실되면서 중국 [[궁중요리]]들의 대접 순서, 즉 조합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 요리|프랑스 코스요리]]처럼 순번을 지키는지, 아니면 그냥 한꺼번에 늘어놓는지 등의 예식 자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 수가 없게 된 데다가, 문헌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만한전석에 대해 알고 있던 [[청나라]] 시절 [[환관]]을 찾아내었는데, 이 사람이 요리를 그만둔 지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나이를 먹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탓에 최면요법으로 기억을 불러내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디스커버리 채널 : Cultural Revolution under China에서 그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중국 본토]]에서 만한전석의 복원은 실패로 끝났다. 지금의 만한전석은 그저 값비싼 [[샥스핀]] 같은 고급 요리들을 코스 요리로 만든 것으로 중국 서민들이 먹기에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먹기에도 터무니없이 비싸다. 이렇듯 [[중국 요리]]의 전통이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거의 끊어질 뻔한 위기를 겪었다. 베이징에는 [[명나라|명]](明)·[[청나라|청]](淸) 시대부터 이어진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음식점들이 많았으며, 황실요리에 버금가는 고급음식을 취급하는 고급음식점이 많았다. 당시 이런 류의 음식점들은 [[홍위병]]의 공격을 받고 가게 이름을 죄다 향양(向陽), 동풍(東風) 따위의 근본 없는 이름으로 개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양고기]] [[샤브샤브]]를 팔던 '동래순(東來順)'에는 유명 소설가 [[라오서]][* 라오서 또한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게 끌려다니며 구타와 모욕을 당하고 결국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호수에 투신자살하였다.]의 휘호 '노점신풍(老店新風)'이라는 간판이 걸려있었으나 이 또한 홍위병에게 파괴되었다. 그리고 가게는 '민족찬청(民族餐廳)'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당했다. [[청나라]] 시절 [[건륭제]]가 혼자 몰래 와서 먹고 갔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샤오마이(烧卖, [[딤섬]]의 일종이다.) 가게인 '도일처(都一處)'는 '연경소매관(燕京烧賣館)'으로 개명당했다. 홍위병들은 음식점을 멋대로 점령하고, [[요리사]]들에게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요리를 하라"고 강요했다. 이로 인해 황실요리를 팔던 고급 음식점들이 삽시간에 [[만두]]나 [[빵]], [[죽]] 따위를 파는 간이 급식소로 전락해버렸다. 이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중국 요리]]의 심각한 단절을 가져왔다. 물론 고급 음식점에서도 만두나 빵, 죽을 팔긴 했으나, 이런 곳에서 팔던 음식은 '''[[요리사]]들이 최고급 재료들을 이용하여 작성한 레시피가 수백 년간 고급 음식점의 요리사들에게 전수되던 것들이다. 그러니 죽 한 숟가락과 만두 1개에도 역사가 담겨있는 것인데.''' 홍위병들은 이런 걸 깡그리 무시하고 일반 음식을 팔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 '''[[은나라]] 시대부터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절까지 4천여년 간 발전해 왔던 중국의 식문화가 단 3년 만에 백지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지금도 중국 요리의 정수를 맛보려면 본토가 아니라 '''홍콩'''이나 '''대만'''으로 가야 한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그리고 공산화 이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계속되는 본토의 혼란을 피해서 수많은 요리사들이 전쟁의 화마를 그나마 피할 수 있었던 홍콩이나 대만으로 도피해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요리 또한 각지에서 현지화되면서 또 한 번의 변형 과정을 거쳤기에 과거의 전통 방식과는 또 다른 점도 많다. 특히 고급요리는 주로 홍콩 거주 영국인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했으므로 이들의 입맛에 맞게 리뉴얼되었다. 물론 중국 요리라 해도 서민 요리들의 레시피까지 실전되지는 않았고[* 말 그대로 서민들의 대다수가 농민과 노동자였고, 서민을 타겟으로 한 레시피니까 그다지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마파두부]] 같은 요리가 대표적이다.] 고급 음식점이라고 해도 무조건 문을 닫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이 잠잠해지자 전수받아온 노하우를 살려 고급음식들을 다시 만들었다. 또한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이후로 경제성장에 따라 외식산업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부유층들도 급속히 늘어나며 고급 음식점들도 프랜차이즈화되었다. 그리고 전통 레시피를 재개발하는 과정을 거쳐서 수많은 전통요리들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상당수의 전통 레시피와 노하우가 사라져서 위에서 언급한대로 홍콩과 대만의 레시피를 역수입해야 했고, 그 결과 중국 요리 전체가 홍콩, 대만의 영향을 받아서 각 지역의 특색이 많이 사라졌다. 게다가 홍콩과 대만의 전통 요리들도 위에서 언급했듯이 현지화되고 수십년을 거치면서 과거 전통요리와는 어느 정도 달라졌던지라, 전통 레시피라고 복원한 것조차 과거와는 많이 다르다.[* 이는 시대가 변하면서 신세대의 입맛에 맞게 레시피를 개량한 영향도 있다.] 상술한 [[만한전석]]도 [[홍콩]]에선 지금도 잘만 만들어지지만 정통과는 상관이 없고, [[청나라]] 궁중요리와 아무 상관없는 그냥 비싼 [[광동 요리]]들을 진열해 놓고 자기들 맘대로 만한전석이라 부를 뿐이다. 아무튼 이러한 연유로 인해 많은 종류의 레시피들이 사라졌거나 극적인 변화를 맞았다. 귀족과 황제가 먹던 음식이 무엇인지 살려낼 수도 없는 상황 자체만으로도 외국인들에 식문화를 내놓는 입장에서는 큰 타격이라 할 수 있다. 왜 궁중요리가 여행객들 사이에서 유명하냐면 '''가장 높으신 분의 식사'''이기 때문이다. 높으신 분의 음식은 당연하게도 모든 면에서 까다롭게 준비된다. 가장 신선하고 고급진 식재료를 엄선하고, 그 가운데 격이 낮은 재료도 어떻게 조리하면 그 격식이 극상으로 높아질지도 끊임없이 고민한 산물이 현재 고급 음식점에서 볼 수 있는 궁중요리다. 그런데 베이징을 포함한 중화인민공화국령에서는 이것이 거대한 타격을 입고 그 상당수가 기억의 소실로 인해 불완전해진 상황에서, 국공내전 당시 대만과 홍콩으로 피난을 온 요리사들이 만드는 요리(및 광둥/대만의 영향도 받는 요리)가 도로 들어오는 것이니 모든 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위와는 별개로 문화대혁명은 중국 본토 음식 문화에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는데, [[호남 요리|매운 음식]]이 상대적 득세를 하게 된 점이다. 다름아닌 [[마오쩌둥]]의 고향이 후난성이기도 하고, 그래서 매운 음식 부심 또한 매우 강해서 대중에게도 적극 권장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매운 요리를 매우 좋아했으며 고추를 곁들인 요리를 즐겨 먹었다. 정적들을 숙청할 때도 돌려서 "[[코렁탕|저놈들에게 고추를 좀 먹여야겠다]]"라고 표현할 정도. 그러다보니 다른 지방 요리들은 어느정도 몰락을 면치 못했으나, 후난 지방 및 그 인근(쓰촨 및 구이저우) 방식의 음식법은 마오쩌둥의 비호 아래에 널리 퍼져나갈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