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악영향 (문단 편집) === 스포츠 === [[스포츠]]도 예외는 아니어서 중국 [[축구]]나 [[농구]] 분야에서 많은 인재와 옛 기록, 흔적 등이 말살되었다. 이 당시 중국은 선수들이 외국풍에 물든답시고 [[올림픽]]은 물론 모든 체육종목의 해외대회에 참가를 거부할 정도였다. 한국 축구인으로서 한국과 전 세계 축구 역사, 용품 등을 수집하는 이태형이 1950년대 중국 [[연변]]팀 축구 유니폼을 겨우 구했는데, 조선족인 정지승이 어렵게 보관하여 겨우 남은 것이었다. 당시 클럽 유니폼까지 불타서, 지금도 중국에서는 이 시절의 [[축구]] 유니폼을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정지승도 문화대혁명 당시 인민재판에 끌려나와 축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모욕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1990년대 후반 한국으로 귀화하여 한국 축구계에서 일했으나, 심부전증으로 66세에 급사했다. 이는 지금까지도 중국 축구의 부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중국에는 [[호나우두]]가 밭을 갈고 [[펠레]]가 공장을 돌리고 있다"'''고 개드립이 나올 정도다. [[중국 슈퍼 리그]] 팀들 중 역사가 오래된 팀들도 1970년대 이전 역사자료를 찾기 힘든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중국에서 국기(國技)라 일컫는 [[바둑]]도 4구악[* 낡은 문화, 사상, 풍속, 습관을 가리키는 말이다.]이라 하여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탄압해놓고서 정작 진짜 [[도박]]으로 유명한 '''[[마작]]'''은 어찌하지도 못했다.(...) 괜히 [[리콴유]]가 '''"[[중국인]]들에게 어지간한 것은 다 금지시킬 수는 있어도 마작은 금지시킬 수 없었다"'''고 말한게 아니었다. 당시 손꼽히던 청년 기재로 이름을 떨치던 [[녜웨이핑]]은 [[헤이룽장성]]의 돼지 도살장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같이 반동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시골에서 고생하고 있던 [[시진핑]]과 만나면서 절친이 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바둑에 대한 [[중국 정부]]의 인식 전환으로 인해 다시 바둑을 두게 되었다. 훗날 녜웨이핑은 중국의 1인자가 된 뒤, "헤이룽장성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그나마 스포츠 분야는 중국의 수많은 인재와 [[소련]]에서 들여온 트레이닝 시스템을 통해 재빠르게 피해가 복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