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악영향 (문단 편집) === 종교 및 문화 박해 === 문화대혁명으로 괴멸적 타격을 입은 것은 [[중국]] 전역의 [[종교]]들도 마찬가지였다. [[홍위병]]들 입장에서는 문화재와 함께 모조리 박해하고 때려 부수고 타도해야 할 1순위가 종교였으며, 특히 [[소수민족]]들의 종교가 공격 목표였다. 이 시기에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종교는 착취계급이 이용하는 도구]]로 반드시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 문제를 처리한다는 [[종교]] 말살정책으로 당의 모든 종교 사무 부분을 완전히 폐쇄시켜서 중공 치하에서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하던 각 지방 종교단체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천주교]]의 경우, 각 지역의 홍위병들은 각 [[성당]]에 들어가, 건물과 성상을 부수고[* 일례로 1602년에 세워지고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은 상하이의 쉬자후이 성당(徐家汇聖堂)은 홍위병들에 의해 성상과 성화, 파이프오르간이 파괴되었고 문화대혁명 동안 과일창고로 사용되었다. 이후 1982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조선에서 최초로 선교활동을 하다가 [[신유박해]] 때 처형된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생가가 파괴되었다.] [[성경]]을 태우는 등 기도와 전례, [[성경]] 읽기 등을 모두 금지시켰다. 또한 교회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고 난징의 금릉협화신학원(金陵協和神学院)을 비롯한 신학교도 폐교되었다. 다른 종교들 역시 비슷한 상황을 맞았으며, 이에 중국에서 공식적인 종교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티베트 자치구]]에서는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최소 2,176개에 달하던 [[티베트 불교]] [[절(불교)|사찰]]이 [[1976년]] 기준으로 단 '''10개'''만 남게 되었으며,[* 그나마 보존된 사찰들까지 대부분이 곡물 창고나 군대 본부로 쓰이게 되었다.] 가장 크고 티베트 내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사원이었던 간덴 사원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었고, 수도원의 건축 자재들은 인민해방군 군대 막사와 중국 관리들의 주택으로 재활용(?)되었다.[* 심지어 수도원 철거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수많은 [[승려]]들이 추방되고 고문을 당하다 학살당했다. 홍위병들은 비참한 모습의 시체들이 완전히 썩을 때까지 대로변에 전시했다고 한다. 나머지 승려들은 강제 환속되었으며 아예 대중들 앞에서 알몸으로 남녀 승려 및 민간인 남녀 간의 [[성관계]]를 강제하고 아기의 [[출산]]을 확인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중국사에서 이런 식으로 불교에 대한 박해 즉 폐불(廢佛)은 이른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이라고 해서 네 차례에 걸쳐 벌어졌지만, 그 법난조차 이런 식으로 불교를 가혹하게 박해하지는 않았다.] 이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예시 몇 개만 들자면, 5~9대 [[판첸 라마]]의 무덤들이 파괴되었고, 철거된 사원의 터에 있던 불상들은 한마디로 말해 점토 불상들은 비에 녹아내렸고, 구리 불상들은 부서져 더미로 쌓였으며, 금불상들은 먼 곳에 있는 제련소에서 녹여졌다.[* 실제로 베이징에 있는 제련소에서 녹여진 티베트 불상이 '''단 한 곳에서만''' 600'''__톤__'''에 달했다고 한다.] 심지어 수많은 경전 및 관련 문서들은 문자 그대로 '''화장실 휴지로''' 사용되었는데, 이 경전들 중에는 무려 8세기경에 [[인도]]에서 직접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사본들도 있었기 때문에 만약 사본들이 그대로 살아 남았다면 세계 불교사가 다시 쓰였을 것이라고 한다. 간덴 사원에서 가장 신성하게 모셔지던 쫑카빠(1357~1419)의 [[등신불]]을 모시고 있던 탑은 "구습과 결별했음을 보이라"며 [[승려]]들로 하여금 스스로 탑을 부수고 등신불을 꺼내어 불에 소각하게 하였는데 홍위병들이 물러나자 불을 놓은 승려가 직접 불 속에 뛰어들어 불에 타다 남은 유골을 구출했다. 후에 유골은 [[인도]]에 있는 [[달라이 라마]]에게 보내지고 유품과 [[사리(불교)|사리]]를 수습하여 다시 탑을 세웠다. [[포탈라궁]]도 파괴될 뻔 했으나 역시 문화재를 지키려 했던 [[저우언라이]]가 편지를 보내 "이런 건물이 하나쯤은 남아 있어야 후에 봉건계급이 어떻게 농노들을 착취했는지 교육할 수 있다!"라고 회유함으로써 겨우 살아남았다. 그러나 포탈라궁 언저리에 있던 [[달라이 라마]]의 직속사원인 남걜 사원과 옛 [[티베트]] 의회 건물은 파괴되었다.[* 사실 [[티베트]] 억압은 진주 직후인 1951년부터 행해졌는데, 당시 증언에 의하면 중국공산당 간부들은 사람들에게서 명망이 높던 [[티베트 불교]] [[승려]]들을 강제로 데리고 나와 채소밭에서 거름을 주는 천한 일을 공개적으로 시키거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고양이]]나 [[개]]를 죽이게 하는 등의 행동을 시켰고 티베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또 [[무슬림]]들이 많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에서는 [[홍위병]]들이 [[쿠란]]을 불태우고, 대부분의 모스크를 일부러 돼지[* 이슬람교 교리에서 돼지는 매우 불결한 존재로 취급된다.] 사육 시설로 만들고, 무슬림에게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했으며, [[이맘]]들이 끌려나와 물감을 뒤집어쓰고 [[조리돌림]]을 당하고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동화와 혼혈을 강제하는 등[* 굳이 말하면 명나라 때부터 위구르인들은 일단 한족과 결혼하도록 주원장에 의해 법제화되어 있었다.] 린치의 대상이 되었다. 1975년에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회족]] 무슬림 1,600명을 학살하는 샤덴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연변 지역의 [[조선족]]들도 그들의 출신을 한반도 지역으로 기록한 [[족보]]가 훼손되거나 소각되었다. 단순히 족보가 소실되었다는 정도로 끝나지 않고,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에 살고 있지만 내 고향은 한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조선인들이 중국의 항일전쟁에 피흘려 싸운 급부"라는 민족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던 연변 지역의 조선인들의 머릿속 조국관, 민족관 자체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사라졌고 지금과 같은 "우리는 중국내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중국조선족", "우리의 조국은 중국"이라는 식으로 사상이 개조되었다. [[4인방]]의 한 명인 장칭의 사주를 받아 연변에 온 마오위안신(毛遠新)[* 마오쩌둥의 조카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위구르인한테 살해당했고, 마오쩌둥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 동북의 태상황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자랑했다고 한다. 마오위안신이 연변에 왔던 사실은 중국 정부의 기록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고, 후술할 연변의 조선족 사진사가 찍은 사진을 통해 공개되었다.]과 그 일당은 "'''조선족은 믿을 수 없다'''", "조선어의 수명은 기껏해야 10년 내지 15년이다", "연변 문화대혁명이 외국(북한)이 손을 뻗쳤다", "연변에서는 다시 한 번 대동란과 대분화가 일어나야 한다", "조국의 동북변방 연길에 몸서리치는 반혁명 반란사건이 일어났다"며 민족 의식이 뚜렷한 이들을 반혁명분자, 조선(북한) 또는 일본의 특무(간첩), 지식분자로 몰아 집중적으로 박해했는데, 당장 북한의 특무로 몰려 실각한 연변 조선족 자치주 초대 주장 [[주덕해]]를 시작으로, 분리주의자로 몰려 조선족자치주의 주장과 서기들은 물론 학교에서 조선의 역사와 말글을 가르치던 교사들이 홍위병들에게 끌려나와 조리돌림을 당하고 자아비판을 강요당하고 구타당해 죽는 것은 물론[* 남한이나 북한에 친척이 있으면 조선특무(간첩), 공산당을 위해 소련에 갔다 온 사람은 소련특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일본 공장에서 일했다고 해서 일본특무, 교사들은 노동자와 대립된다고 해서 지식부자라는 누명을 썼고, 자본주의의 길로 나가는 자들이라 하여 일삼은 감금과 폭행을 당했다.][* 이때 고초를 겪은 이들 가운데는 조선인 출신으로 중국에서 '영화 황제'라 불리던 배우 [[김염]], 조선인 출신의 음악가로 중국인민해방군가의 작곡가로 유명한 [[정율성]],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조선의용대로도 활약했던 여류 독립운동가 [[이화림]]도 있었다. 특히 정율성의 경우는 1956년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가 숙청되는 것을 보고 북한을 떠나 중국 국적을 얻어 정착했던 인물이었다. 북한을 피해서 중국으로 왔는데 중국에서조차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당한 셈이다.] 조선인 공동체였던 용정의 명동촌에 위치한 명동학교[* [[윤동주]] 시인의 모교다.]와 명동교회의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김약연]]의 칭송비도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고 땅에 파묻혔다가 후에 다시 파내서 세웠다.[[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23993|#]] 길거리에 '평양냉면', '함흥냉면', '인천백반점' 등 한국 관련 지명이 붙은 음식점 간판까지도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집에서 한글로 된 편지나 한복을 입은 사진만 발견되어도 홍위병들에게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연변 지역 조선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족보는 물론 한글로 쓴 책, 편지나 한복 입고 찍은 사진 등 '한국적(조선적)' 색채가 짙게 드러난 물건들은 모두 불태워 없앴다. 또한 이때 '''[[만주]]에 있던 항일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상당수 소실'''되어[* 당연히 '조선 독립'이니 '대한 독립'이니 하는 구절이 들어있는 문서를 홍위병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임에도 증명할 자료가 없어서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전혀 엉뚱한 인물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가 하면, 현재까지도 한국 학계에서 만주 지역의 항일무장투쟁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심각한 자료 부족을 겪고 있다.[* 한국 항일무장투쟁사에서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대첩]]과 함께 '3대 대첩'으로 꼽히는 [[대전자령 전투]]의 경우, 박창욱 등 연변 지역의 조선족 학자들 사이에서는 중국 측 항일투쟁 집단이 주도한 전투를 한국 독립군이 자신들의 행적인 것으로 부풀려 과장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기도 한다.] 또 박해를 피해 수없이 이사를 다녔으며 심지어 성씨까지 한국과 관련이 없는 중국식 성씨로 바꾸기도 했다. 문화대혁명을 피해 북한으로 달아난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북한 정권으로부터 '중국의 간첩' 내지 '수정주의자'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과장 조금 보태면 중국조선족들이 극성스럽게 그들의 한민족 문화를 중국과 연계시키며 중국의 입장에서 중국의 문화로 소개하려고 드는[* 대표적으로 [[윤동주]] 시인을 중국조선족의 대표시인으로 소개하고 있는 현지 안내문 등이 있다.[[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811011518331326|#]]] 편집증적인 태도 역시 문화대혁명을 겪은 [[PTSD]]라고 할 수 있다. 그걸로 인해서 한국인들이 중국조선족들에게 곱지 않은 감정을 품게 되었으니, 문화대혁명의 여파는 당대 중국 안에서만 그치지 않고 후대 [[한중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중국조선족들이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겪었던 고초나 당시의 상황을 사진으로 찍은 사진집이 2010년에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제목은 <연변 문화대혁명 - 10년의 약속>이다.[* 제목에 '10년의 약속'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저자인 한국인 류은규가 중국 조선족 사료를 수집하면서 문화대혁명 때의 공백을 백방으로 찾던 중 [[1999년]] 용정(룽징)의 조선족 사진가로 문화대혁명 당시 연길현문화관에서 근무하면서 연변에서 벌어졌던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사진으로 찍었던 황영림이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고, 류은규는 그를 찾아가 몇 차례나 설득한 끝에 그가 당시 촬영한 사진을 얻어 <잊혀진 흔적-사진으로 보는 조선족 100년사>(2000년)를 엮을 수 있었다. 얼마 뒤 황영림은 "'''사진을 당신에게 주겠으나, 바로 공개하면 절대로 안 된다. 꼭 내가 사망 후 공개하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찍은 사진 6천 장을 모두 류은규한테 넘겼고, 황영림이 2006년에 타계한 뒤에 류은규는 그와의 약속대로 그 사진을 공개했다. 부제 '10년의 약속'이 붙은 연유다.] 중국의 [[기독교]] 신자들도 [[배교]](背敎)를 강요당했고, 거절하면 당국에 끌려가 구타와 [[가혹행위]] 및 고문을 당했다. 개요의 소개영상에서도 나오듯이, [[성당]]들도 홍위병들에게 습격당해, [[성모]]상 등 각종 [[성상(조형물)|성상]]들은 그 자리에서 꺼내져서 파괴되었고, 그 자리엔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리는 일도 있었다. 몇 남지 않은 [[수도원]]들도 파괴되었으며, 가정 [[예배]]나 [[기도(종교)|기도]]도 금지되고, 홍위병들은 기독교 신자들의 집에도 들어가, [[성경]]과 [[찬송가]] 서적 등을 빼앗아 불태우고 다녔다. 종교인들은 끌려나와 공개적으로 홍위병들 앞에서 갖은 치욕을 겪었다. 쉬자후이 성당의 [[서광계]] 유적지도 훼손되었다. 등록되지 않은 종교활동은 물론이고, [[중국 정부]]에 종속되어있는 어용 종교단체의 활동마저 완전히 금지되었다. 중국의 관제 종교단체를 관리하는 국가종교사무국이 이때 모든 활동을 멈추고 사실상 해체 상태에 있었을 정도였다. 등록되지 않은 종교활동을 하는 종교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어용 종교단체 소속 종교인들도 당국과 홍위병들에 의해 끌려나와 수모를 당했다. 이외에도 [[나시족]]의 동파문자 문서들 중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카이펑 유대인]] 커뮤니티가 박해당했다. 여러 소수민족들 중 문헌기록을 가졌던 이들은 이때 자신들의 전통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중국 소수민족들은 한족에 많이 동화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