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악영향 (문단 편집) === 전통의 피해 === 문화대혁명으로 가장 피해를 본 분야는 사실상 전통과 문화에 대한 부분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중국 내에서의 문화유산 소실과 훼손, 전통문화 단절이 10년 동안 매일같이 이어졌다. 아래 항목은 문화대혁명 당시에 파괴된 유적들과 역사적 인물들의 무덤이 파묘된 현황을 대략적으로 보여준다. 참고로 묘는 무덤(墓, 陵)과 사당(廟, 祠)으로 구분한다. * [[신농|염제]]릉(炎帝陵)의 주전(主殿)은 불에 탔다. 염제릉은 파묘되었고 신농의 유골은 불태워져서 뿌려졌다. * [[창힐]]의 능원(무덤)은 훼손되었고, "열사능원"으로 개조되었다. * [[산시성(산서성)|산서성]]의 [[순(삼황오제)|순제]]릉(舜帝陵)은 훼손되었고, 무덤 위에 큰 나팔이 박혔다. * [[저장성]] [[사오싱시]] 회계산에 있는 [[우(하나라)|대우]]릉(大禹陵)과 대우묘(大禹廟)는 훼손되었고, 우임금의 조각상은 머리와 목이 잘렸다. * 1966년 11월 29일에는 무려 '''[[공자]]의 무덤(孔墓)'''이 파묘되어 평평해졌다.[* 이는 [[천보다]] 중앙문화혁명소조장의 승인을 받은 것이었다. 덤으로 천보다는 공자 일가의 묘소를 파괴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홍위병에게 하달하기까지 했다. 여담으로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렇게 파헤친 공자의 무덤 안에서는 정작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대성지성선사문선왕(大成至聖先師文宣王)'이라는 비석과 묘비가 파괴되어 돌가루가 되었다. 공묘(孔廟)의 이태소상(泥胎塑像)도 훼손되었다.[[http://d.ifengimg.com/mw604/y0.ifengimg.com/ifengiclient/ipic/20141125/weixin_464_0TteSMzLyGm9bHQjPHKia7xhZ3FASeBRM8Dp484RuFonOzacNIOg4eQVw3WqEibeo8Yg9bhQQqwPWbT6Tk6iaHUQA_w450_h667.jpg|#]] 또한 공자의 76대손인 [[쿵링이]][* 마지막 연성공이자 중화민국 고시원장을 역임한 [[쿵더청]]의 아버지다.]의 무덤이 파묘되었다. 당시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홍위병들이 공자 후손들의 묘들을 파묘해서 아직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아 형체가 있는 '''멀쩡한 시신들은 나무에 매달았다고 한다.''' * 화현(和縣) 오강(烏江)변의 [[항우]]의 패왕묘(霸王廟), [[우미인|우희]]묘(虞姬廟)가 파괴되었다. 우희의 무덤은 파묘되었고 이후 패왕묘에 남은 것은 반쯤 땅에 묻힌 석사자(石師子)밖에 없었다고 한다. * [[곽거병]]의 무덤(霍去病墓, 霍陵이라고도 불린다.)은 파괴되었고 향촉(香燭)과 첨통(簽筒)이 부서진 것 외에 곽거병의 소상(塑像)도 하루아침에 훼손되었다. * [[이화원]]의 불향각(佛香閣)이 부서지고, 대불(大佛)이 훼손되었다. * 고성태원(古城太原)의 신임 시위원회는 첫째 묘우(廟宇)를 파괴하고 전시의 190여 곳의 묘우 고적(古蹟)은 10여 곳을 제외하고 모두 훼손되었다. 그나마 산서성 박물관 관장이 급히 방림사(芳林寺)로 가서 겨우 이소인두(泥塑人頭, 흙으로 빚어 구운 사람의 머리 형상이다.) 한 무더기를 구했다. * [[후한]] 말 한의사인 [[장중경]]의 소상이 훼손되었다. 묘정(墓亭), 석비(石碑)도 파괴되었다. 장중경기념관의 전람품은 하나도 남지 않았고 의성사(醫聖祠)는 사라졌다. * [[허난성|하남성]] [[뤄양시]]의 [[제갈량]]의 제갈초려(諸葛草廬)(혹은 무후사(武侯祠)라고 불린다.)의 천고인룡(千古人龍), [[유비|한소열황제]]삼고처(漢昭烈皇帝三顧處), 문도무략(文韜武略)의 3개의 석방(石坊)과 인물소상, [[명나라]] 성화연간(成化年間)에 만든 18개의 유리나한(琉璃羅漢)이 모두 훼손되었다. 전각의 장식물도 모두 파괴되었다. [[청나라]] 강희(康熙)가 지은 《용강지(龍崗志)》, 《충무지(忠武志)》등의 목각본도 불에 타버렸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청두]]의 무후사, 즉 [[청두 유비혜릉]]은 용케도 문혁에서 살아남아, 삼국지 관련 전근대 유적 중 대표적인 유적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 한중 면현(勉縣)의 고정군산(古定軍山) 석비는 [[제갈량]]이 지주(地主)분자라는 이유로 훼손되었다. * [[산시성(산서성)|산시성]] 운성박물관은 원래 [[관우]]의 사당이었다는 이유로 파괴되었다. * [[왕희지]]의 무덤과 20무(畝)[* 전답의 단위로, 6척 사방을 보(步), 100보(步)를 무(畝)라고 한다.]에 달하는 금정관(金庭觀)이 평평해졌다. 현재는 우군사(右軍祠) 앞의 오래된 몇 그루의 측백나무만 남아있다. *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 백마사가 있었는데 천여년 전에 [[요나라]] 때에도 있었던 18나한상과 2천여년 전 인도 고승이 갖고 온 [[패엽|패엽경]]과 옥마를 네 가지 구습으로 몰아서 파괴하고 불태웠다. * [[당나라]]의 고승(高僧) 포선(褒禪)이 말년에 머물고 [[왕안석]]이 유람하고 《유포선산기(游褒禪山記)》를 짓고 유명해진 포선산에 있던 대소(大小) 2개의 탑이 모두 훼손되었다. * [[북송]]의 시인인 임화정(임포)(林和靖, 967~1028)의 무덤이 파묘되었다. 하지만 《서호몽심(西湖夢尋)》에 따르면, 아주 오래 전에 [[남송]]이 멸망했을 당시 도적떼가 임화정의 무덤을 파묘했었을 때 시체는 없었다고 한다. * [[북송]] 대문호(大文豪) [[구양수]](歐陽修)의 《취옹정기(醉翁亭記)》는 [[소식(시인)|소동파]](蘇東坡)가 글을 비석에 새겨져 안후이성 제현에 있었는데, 홍위병들은 천 년을 이어온 이 석비(石碑)를 넘어뜨리고 소동파의 글을 파내고 훼손했으며, 취옹정(醉翁亭) 안에 보관되어 있던 역대 명가(名家)들의 서책과 그림들을 모조리 훼손했다. 지금까지도 뭐가 훼손되었는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 합비에서 대대로 보호하고 매년 제사를 지내오던 [[포증|포청천]]의 무덤이 파묘되었다. * [[허난성]] 탕음현 중학생이 [[악비]] 등의 소상, 동상, [[진회]] 등 오간당(五奸黨)의 철궤상(鐵跪像)을 포함해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비각(碑刻)까지 모두 파괴해서 없애버렸다. 또한 항저우 혁명청년이 악묘(岳廟)를 파괴했다. 악비의 무덤은 파묘되었고 악비의 유골은 불태워져서 뿌려졌다. * [[홍무제|주원장]]의 거대한 황릉석비(皇陵石碑)가 쓰러졌다. 황릉에 있던 석인(石人), 석마(石馬)가 폭약으로 파괴되었고 명나라 황성(皇城)도 깨끗하게 철거되었다. * [[영락제]]의 무덤 장릉(長陵) 능은전에 있던 영락제의 석상도 파괴되었다.[* 지금 영락제의 동상이라고 알려진 것은 후에 금속으로 복원한 것이다.] * [[허난성]] 안양현의 [[명나라]] [[영락제]]의 3남이자 [[홍희제]]와 [[주고후]]의 남동생인 조간왕(趙簡王) 주고수(朱高燧)의 무덤이 파묘되었다. * [[하이난성]]에 있는 천애해각(天涯海角)에 [[명나라]] [[가정제]] 때 명신인 [[해서(명나라)|해서]][*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계기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의 무덤이 파묘되었고 해서의 유골은 불태워져서 뿌려졌다. * [[왕수인|왕양명]]의 문묘(文廟)와 왕문성공사(王文成公祠)의 2개의 건축과 왕양명의 소상(塑像)이 전부 훼손되었다. * [[명나라]] [[만력제]] 때의 재상인 [[장거정]]의 무덤이 파묘되었고 장거정의 유골은 불태워져서 뿌려졌다. * 1966년 8월 24일에는 [[만력제]]의 묘인 정릉을 점령하고 부장품을 닥치는 대로 파괴한 후 만력제와 황후들의 시신을 끌어내어 "봉건지주계급의 우두머리를 심판한다"는 구실로 [[인민재판]]에 회부해 [[투석형]]에 처해 가루로 만들었고, 남은 잔해는 모조리 불태워서 빗물에 흘려보냈다. 만력제의 시신은 현재 머리카락 일부와 사진 자료만 남아있다. * 베이징 내의 [[원숭환]]의 무덤이 파묘되어 평지가 되었다. 또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목을 맨 회나무가 베어졌다. * 여평고리(黎平故里)에 안장되었던 [[명나라]] 말의 명신 하등교(何騰蛟)의 사당에 있는 [[불상]]이 파괴되었고 무덤이 파묘되었다. * 《[[서유기]]》의 작가 [[오승은(명나라)|오승은]]의 옛집은 [[장쑤성]] 회안현 하하진 타동항에 있었는데, 폐허가 되었다. 이 집은 3개의 담으로 구분되어, 남쪽은 객청(客廳), 가운데는 서재(書齋), 북쪽은 침실(卧室)로 구성된 단출한 집이었고, 수백 년간 "회안현에는 많은 절경이 있으나, 사람들이 가서 문안하는 곳은 이 오래된 집과 그의 묘밖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또한 오승은의 무덤이 파묘되었다. * 《[[요재지이]](聊齋志异)》 작가인 포송령(蒲松齡)의 묘가 파묘되었다. 파묘해보니 담뱃대와 머리맡의 책 1권만 있었는데 책에는 4개 구절의 문장이 쓰여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홍위병들은 이것이 포송령의 글인지 알아보거나 하지도 않고 찢어서 들판에 마구 흩어버린 후, 포송령의 유골을 불태웠다. * 1959년에 세워진 [[청나라]]의 문인 오경재(吳敬梓) 기념관이 파괴되었다. * [[청나라]]의 무신 천고의개(千古義丐) 무훈(武訓)(1838~1896)의 무덤이 [[산둥성]] 관현중학 홍위병들과 교사의 선동에 의해 파묘되었고 무훈의 유골이 불태워져서 뿌려졌다. * [[청나라]] 말기의 개혁가인 장지동(張之洞)의 무덤이 파묘되었다. 장지동이 청백리여서 보물이 없자, 홍위병의 지역 수장인 장 씨 부부는 장지동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고 수 개월간 방치하여, 개가 장지동의 시체를 뜯어먹었다. * [[청나라]] 말기의 장태염(章太炎), 서석린(徐錫麟), 추근(秋瑾) 및 양내무(楊乃武)와 소백채(小白菜)의 사건에 관련된 양내무(楊乃武)의 무덤이 파묘되었다. 홍위병들은 "소의 귀신과 뱀의 요괴(우귀사신)를 모조리 없애버린다"는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 [[청나라]] 말기의 명신인 [[좌종당]], [[이홍장]], [[캉유웨이]]의 묘가 파묘되었고 좌종당과 이홍장의 유골은 불태워졌다. 홍위병들은 [[캉유웨이]]의 머리를 잘라서 따로 [[칭다오시]]의 조반유리(造反有理) 전람회에 보내 전시했다. * 베이징 교외의 은제장(恩濟庄)에 묻힌 [[동치제]], [[광서제]]의 궁정대총관(宮廷大總管) [[이연영]]의 무덤이 파묘되었고 비문이 파괴되었다. * [[저장성]] 봉화현 계구진의 [[장제스]]의 옛집은 파괴되었다. 또한 장제스의 생모 왕차이위의 무덤이 파묘되어 왕차이위의 유골은 불태워졌다. * 남장현의 항일명장 장자충(張自忠)이 건축한 장공사(張公祠), 장씨의관총(張氏衣冠冢)과 3개의 기념정(紀念亭)이 파괴되었다. * [[산시성(산서성)|산시성]] 태원에 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 [[안창남]]의 묘도 국민당 반동으로 몰려 파묘되었다. * [[쑹자수]]의 무덤이 [[장칭]]의 명령에 의해 파묘되었다. '''참고로 이 때는 쑹자수의 딸인 [[쑹칭링]]이 살아있었다.''' * 중화민국 주석을 지낸 [[린썬]]의 무덤이 폭파되고 린썬의 유골은 불태워져서 뿌려졌다. * [[양후청]]이 국민당반동파로 몰려서 파묘되었고 묘비가 훼손되었다. * [[가오강]]의 묘비가 파괴되었고 [[룽윈]]의 자택도 파괴되었다. * [[안후이성]] 곽저현 문묘(文廟), [[산둥성]] 래양 문묘, [[지린성]] 문묘도 모두 파괴되었다. * 전국최대의 [[도교]]성지인 [[노자]]강경대(老子講經台)와 주위 근 100여 개의 도관(道館)이 훼손되었다. * 천년 넘게 [[자금성]]의 외성 역할을 해준 [[베이징]] 성곽[* 길이만 50km가 넘어가는 초대형 성곽이었다.]을 3년만에 완전히 없애버렸다. 현재 그 성곽 터에는 3환로가 깔리고 30년 이상이 지난 뒤에 그 밑에는 [[베이징 지하철 10호선]]이 지어졌다. * [[자금성]]의 황성과 내성, 그리고 외성을 5년 만에 전부 헐어버렸다. 현재 2환로가 내성과 외성 자리에 있고[* 내성과 외성이 겹치는 부분은 2환로가 아니다. 그래서 2환로 선형은 남쪽 부분이 더 넓다.], 내성이 있던 자리에는 '''[[베이징 지하철 2호선]]이 정확히 똑같은 선형으로 지어졌다.''' * [[신장 위구르 자치구]] 투르판의 화염산에 있는 천불동(千佛洞)의 벽화가 파괴되었고, [[고창국|고창]](高昌)의 [[경교]], [[마니교]] 사원 유적이 파괴되었다.[* 파괴하고 남은 흙은 1500년 동안 놀고 있던 흙이라서 작물이 잘 된답시고 비료로 만들어서 밭에다 뿌렸다.] * [[손첸감포]]와 [[문성공주]] 두 사람의 소상(塑像)이 [[티베트 자치구]] 각랍사(覺拉寺)에 있었는데 훼손되었다. * 그 외에도 [[https://blog.daum.net/shanghaicrab/16155602|이 글의 내용처럼]] 수많은 명사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들이 엄청나게 유실되었다. 심지어 더욱 놀라운 것은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피눈물을 쏟아낼 이 참혹하기 그지없는 내용들은 문화대혁명 당시 문화재 파괴 목록 중 '''__극히 일부__'''라는 것이다. [[https://shanghaicrab.tistory.com/9950585|참고자료 1]] [[https://zh.wikipedia.org/wiki/%E6%96%87%E5%8C%96%E5%A4%A7%E9%9D%A9%E5%91%BD%E6%97%B6%E6%9C%9F%E6%96%87%E7%89%A9%E5%8F%A4%E8%BF%B9%E6%8D%9F%E6%AF%81%E5%88%97%E8%A1%A8|참고자료 2(중국어 위키백과)]] 위에 열거된 것만 해도,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피눈물을 줄줄 쏟을 만큼 귀중한 문화재들이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실제로 1966년 8월부터 9월까지 '''단 1개월 동안''' [[베이징시]]에서만 1958년에 시립 보호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80곳 중 30곳이 소실되었으며, 같은 해에 베이징 정부의 결정으로 보호 중이었던 유적지 6,843곳 중 4,922곳이 훼손되거나 파괴되었다.[* 참고로 [[홍위병]]들은 이 문화재 파괴가 '우리 수도를 더 맑고 붉게 만들고 열일곱 번째 국경일을 품위 있게 맞이하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여기서 '국경일'은 [[1949년]] 10월 1일에 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의미한다.] '''수도 한 곳에서만, 그것도 __수도 당국이 손수 보호했던__ 문화재들만 해도''' 이렇게나 소실되었으니 수도가 아닌 곳에 있었거나 당국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민간에 전해져온 문화재들이 얼마나 많이 소실되었는지는 가늠하기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문화대혁명 시기에 줄국 전역에서 방화와 약탈, 테러, 철거, 도굴 등으로 사라진 문화재만 추산하면 '''최소 10만여 점 이상'''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이 추정치에서 빠진 무형문화유산과 지방 유림, 도교, 불교, 소수민족 등의 문화까지 추산하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하다. 실제로 홍위병들은 베이징에서만 11.4만 가구를 수색했고, 상하이에서는 ([[저우언라이]]의 말에 의하면) 자본가 10만 가구가 몰수당했으며, 전국적으로는 '''1천만 가구를''' 수색했다고 하고, 랴오닝, 지린, 허난, 장시, 구이저우 이렇게 '''단 5개의 성에서만''' 무려 700만 권의 서적이 망실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소실된 문화재들의 수는 최대치로 치면 '''천만 단위(!!!)'''일 가능성도 있다. 파괴된 문화재와 유적의 상당수는 [[덩샤오핑]]이 집권한 이후로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재평가 기조가 이어지고 있고 또한 중국 내 관광 및 레저산업이 1990년대 주5일제 시행과 소득수준의 상승으로 발달되기 시작하면서 관광산업에 대한 중요성이 인식되어 가며 복원되거나 복원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원 모습을 알 수 없어 영영 복원하지 못하거나 엉터리 고증으로 원 모습과 영 딴판으로 복원된 여러 문화재와 유적들을 생각하면 그저 눈물이 날 뿐이다. 다만 저렇게나 많이 파괴했음에도 2023년 기준으로 [[중국]]은 [[이탈리아]] 다음가는 세계 최대의 [[세계유산]] 보유국이다. 문화대혁명으로 죄다 싹쓸이된 마당에도 중국의 세계유산 등록 건수는 무려 56건으로, 58건이 등재된 [[이탈리아]] 다음으로 현재 세계에서 2번째로 많다. 다만 이들 세계유산 중 일부는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다가 나중에 복원이 된 것도 있다. 즉, 현재 중국에 남아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각종 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문화재는 [[문화대혁명]]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문화재이거나, 문화대혁명 이후에 발견된 문화재들, 혹은 문화대혁명 이후로 복원 작업을 거친 문화재들이다. [[항저우]]의 유명한 [[절(불교)|사찰]] 영은사(靈隱寺)도 [[홍위병]]들에게 습격당해서 파괴당할 뻔했다. 하지만 온건파였던 [[저우언라이]] 총리가 '절 입구와 대웅전 앞에 [[마오쩌둥]] 사진을 붙여놓으라'고 지시해서, 사진을 본 홍위병들이 절을 부수는 걸 주저하다가 그냥 돌아갔다는 일화도 있다. 심지어 [[저우언라이]]가 배치한 경비병이 아니었다면 '''[[자금성]]'''조차 무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막기 위해 자신의 위치에서 은밀한 활약을 펼쳤다. 일례로 문화대혁명 시절, 과학자들에게 경호병력을 붙여 보호했다. [[포탈라궁]]이나 [[막고굴]]에도 역시 위기가 찾아왔지만, 문화재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우언라이의 은밀한 보호 지시 덕분에 추가로 파괴되는 봉변은 피하게 되었다. 특히 중세 봉건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자금성은 문화대혁명 때 파괴당할 뻔했으나 위기를 넘겼다. 1957년 반우파 투쟁에서 '우파 우두머리'로 비난을 받았던 전 중국민주동맹 간부인 [[장보쥔]]의 딸 장이허가 마오쩌둥의 전 비서 리예에게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자금성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집무실을 설치하려 했다고 한다. 1963년에 만들어진 베이징시 도시계획도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자금성의 천안문, 오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등을 모두 해체하고 공산당 중앙당사를 그 자리에 지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장이허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자금성의 모든 건물들에다가 붉은색 천을 줄줄이 걸어놓거나 노동자의 동상을 거대하게 세워놓겠다는 흉측한 발상들도 연이어 나왔으나, 문화재 보호주의자였던 저우언라이의 절박한 반대로 인해 실현되지는 않았다고 폭로했다.[[http://sscn.kr/m/content/view.html?section=80&category=84&no=2577|#]] 저우언라이가 보호를 위해 애썼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 때 자금성이 밀려나가고 공산당 당사가 들어섰다면 중국은 문화적으로도, 관광산업적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명나라]] 황릉도 피해를 당해 [[만력제]]와 황후 효정현황후 왕씨, 후비들(공각황귀비 정씨, 공순황귀비 이씨)의 유골이 가루가 되어 유실되고 부장품 일부가 파괴되어서 결국 만력제의 더 자세한 행적과 건강상의 특징 등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만력제의 황릉인 정릉(定陵)은 1956년에 발굴을 시행했는데, 한창 연구를 진행하던 와중에 [[홍위병]]들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발굴 및 연구에 참여한 연구원들도 상당수가 살해, 감금 등의 학대를 당해서 추가적인 연구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발굴의 총책임자는 베이징 부시장이었던 [[https://en.wikipedia.org/wiki/Wu_Han_(historian)|우한(吳晗)]](1909~1969)이었는데, 문화대혁명의 시발점이 된 '[[해서파관 사건|해서파관]]'을 제작한 그 사람이다. [[중국]]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과 관련된 유적들도 이 당시에 파괴될 뻔했다. 한 번은 쑨원이 [[광둥성|광둥]] 정부 시절에 머물렀던 사저를 파괴하려고 홍위병들이 몰려오자, 관리인이 기지를 발휘해서 [[마오쩌둥]]이 쓴 쑨원을 찬양하는 글을 들고 나와 홍위병들에게 "자, 이래도 여길 부술 테냐!"고 소리치자 [[홍위병]]들이 그냥 물러가 버렸다고 한다. 반면 [[저장성]]에 있던 [[장제스]] 생가는 홍위병들에게 파괴되었고 장제스의 생모인 왕차이위의 무덤이 파묘되어 그녀의 유골이 불태워져서 가루가 되었다. 당연히 현재의 생가는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사라지고 장제스도 어느 정도 재평가된 이후로 복원된 것이다. 그리고 [[충칭시]]에 있던 국민정부 주석 [[린썬]]의 묘소도 가차없이 폭파되었고 린썬의 유골도 불태워져서 가루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안창남]]의 무덤도 문화대혁명 중에 파묘되었으며, 이덕삼 지사 등이 묻힌 상하이 외국인 묘역 '만국공묘'와 베이징 외국인 묘역 2만 5천여 기도 홍위병들에 의해 파묘되었다.[*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인 [[조지 쇼]]의 무덤도 파묘되었다고 전해진다.][[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03/2019050301964.html|#]] 아이러니하게도, 공산화 이전부터 매국노 수준으로 평판이 나빴던 [[위안스카이]]의 무덤은 '''홍위병들의 무덤 뽀개기 광풍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보전되었다.''' [[마오쩌둥]]이 '이런 자도 역사에 있었다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라며 묘지를 보전할 것을 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홍위병들이 위안스카이의 무덤도 파묘하려고 했으나, 콘크리트로 만들어서 그런지 너무 단단하여 가장자리만 조금 깨졌다. [[유교]] 사상의 대부로 여겨지는 [[공자]] 역시 봉건적인 사상가로 취급당해 [[분서갱유]]를 '''__아주__ 가볍게''' 능가하는 극단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1966년 11월 9일에는 여교사 출신이었던 탄후란(譚厚蘭, 1940~1982)[* 모택동의 고향 사람으로 '북경 홍위병의 5대 우두머리(北京紅衛兵“五大領袖”)' 중 하나로 악명 높았다. [[4인방]] 몰락 후 체포되었으며, 천벌을 받았음인지 자궁암으로 죽었다.]이 이끄는 [[베이징사범대학]]의 학생 200명이 기차를 타고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시]](曲阜市)로 가 대성전에 모셔져 있던 공자상이 [[도끼]]로 박살났고, 공자묘도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다. 1966년 11월 9일부터 12월 7일까지 이 한 곳에서 파괴된 유물들은 정확히 '''6,618개'''[*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고서 약 2700점, 회화 및 서예품 약 900점, 국가 1급 문화재 약 70점, 석비 약 1000점, 희귀서적 약 1000점이 소실되었다.]에 달했으며 2000개의 무덤들이 파헤쳐졌다. ~~[[진시황]]이 벌벌 떨겠다.~~ [[https://shanghaicrab.tistory.com/16154808|문화대혁명 당시 공자의 고향에서 일어난 일들을 정리한 문서이다.]] 그외에도 고화들은 찢겨나갔고, 벽화들은 얼굴 부분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으며, 도자기 화병들은 바닥에 던져졌고, 두루마리들은 정치적 슬로건으로 낙서를 당한 데다가, 고서들과 족보들은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그외에도 베이징의 골동품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돌과 나무로 역사적 사건과 일화들을 묘사한 작품들은 인물 조각에서 머리가 잘려나가거나 아예 인물 전체가 잘려나가 이후 골동품 조각품들은 대부분 얼굴과 인물 조각을 복원할 수밖에 없었다.[[https://www.antique-chinese-furniture.com/blog/2013/02/10/burn-loot-and-pillage-destruction-of-antiques-during-chinas-cultural-revolution/|#]] 또한 [[무형문화재]]도 상당수 실전되었다. 대표적으로 문묘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있는데 제향(祭享)하는 법이기도 한 《제공대전(祭孔大典)》도 실전(失傳)되어, [[한중관계|한중수교]] 이후 [[대한민국]]의 [[성균관#s-6|석전대제]]를 참고해서 재현해야 했다. 그리고 석전대제(문묘제례)를 참고했기 때문에 석전대제와 같은 [[고증오류]]를 제공대전에서도 볼 수 있다.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을 연주하는 악사나 팔일무(八佾舞)를 추는 일무원(佾舞員)은 악공이 맡았으며 모두 남성이었다. 입고 있는 복식 자체가 모두 남성 관복인데 [[남장여자#s-2.3]] 문서에서 보듯이 국악, 전통무용 전공자 등의 제례를 수행 가능한 인원 중에서 남성만으로는 숫자가 부족하여 여성이 남자 악인복을 입고 악사와 일무원을 맡고 있다. 현실적인 문제로 발생한 [[고증오류]]인데 [[중국]]의 제공대전에서도 남성 관복을 입은 여성들이 제관이나 일무원을 맡은 모습이 보인다.[[http://korean.china.org.cn/2018-09/29/content_64313630.htm|#]] 다만 이러한 고증오류는 구성원의 성별보다는 형식을 얼마나 잘 재현했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어차피 복장을 보면 실제로는 다 남자가 하던 일이었다는 걸 알 수 있으니 이는 역사왜곡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게다가 이 제공대전도 어디까지나 후대에 형식만 임시로 부활한 것이지, 실제 제사와 그 [[제사]]를 수행하는 직책인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 본래는 '[[공자]]의 뒤를 잇는 제후'란 뜻의 [[연성공]]으로 불렸으나, [[신해혁명]]으로 공화제가 되자 더 이상 [[귀족]] 작위란 형태를 가지기 곤란해졌다. 결국 1935년에 중화민국 정부에서 명칭을 대성지성선사봉사관으로 바꾸었다. 본문에 언급하는 [[쿵더청]]이 바로 마지막 [[연성공]]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다.]은 [[중국]]에서는 다시 부활하지 못해서, [[대만]]에 거주하는 공자의 종손인 쿵쑤이창이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직책을 수행하고 있다. 쿵쑤이창의 할아버지이자 [[국부천대]] 당시 장제스가 대만으로 데려간 봉사관 본인인 쿵더청은 당연히 이 참사에 경악하여서 중화인민공화국에 큰 반감을 가졌다. [[국부천대]] 이후 생전에 한 번도 취푸의 공묘(孔墓)를 찾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자신의 묘지를 취푸에 두지 말도록 했다. 그래서 쿵더청의 묘지는 취푸가 아닌 대만에 있다. 쿵더청은 중국 본토에 남은 누나 쿵더마오[* 남동생인 쿵더청보다 더 오래 살았다. 2021년에 10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를 만날 때도 곡부가 아니라 해외인 [[일본]]에서 만났다. 취푸의 친척들이 [[대만]]을 직접 방문했을 때, 공자 가문에서 대대로 제작하는 술로 알려진 [[공부가주]]를 소개해서 대접하며 취푸를 방문해달라고 부탁하자 쿵더청은 '우리 가문에는 이런 술이 없다.'라며 내치기도 했다. 쿵더청이 공부가주를 몰라봤을 리는 없으므로 이 술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반감이 심했다고 보면 된다. 사실 [[장제스]]가 봉사관 [[쿵더청]]을 [[대만]]으로 데려간 이유는, [[중국]]을 지배한 역대 왕조들이 전부 연성공을 두어 [[공자]]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기 때문이다. 즉 봉사관을 데려간 것 자체가 '우리가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진정한 중국의 지배자'임을 보여주는 정통성을 확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를 통해 소프트파워를 키우려는 중국의 시도가 평가절하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중국은 하드파워는 강하지만, 소프트파워가 취약해 가까운 장래에 [[미국]]을 넘어서기 힘들 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중국]]은 공자학원 등을 통해 소프트파워를 증진시키려 하나, 위에 열거된 엄청난 피해들 때문에 그 노력이 가까운 미래에 보상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그러면 그럴수록 [[대만]]의 정통성을 더 부각시켜주는 면이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결국 자신이 판 함정에 자신이 빠진 꼴이 된 것이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다 파괴해놓고는 이제와서 딴소리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 문화가 문화대혁명 이후로 문화의 깊이가 크게 얄팍해진만큼 공자를 다시 내세우는 이유도 관광산업, 즉 돈 때문이 아니냐는 의심도 충분히 나올 만하다.] [[국부천대]] 이전에도 [[중국사]]를 보면, 이렇게 [[공자]]의 종손을 보호해서 정통성을 주장한 사례가 많았다. 심지어 [[송나라]]가 [[남송]]으로 쫒겨날 때도 종손들을 데리고 가서 남종 가문을 세우고, [[금나라]]도 이를 따라해서 취푸에 남아있던 다른 종손들을 보호해서 북종 가문을 세워서 공자 가문이 둘로 갈라지는 사례도 있었다. 이후 [[원나라]]가 통일한 이후에 남종과 북종이 협의해서, 취푸에 남아서 선영을 지킨 공로가 있는 북종으로 정통성을 정리하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위에 언급한 쿵더청이 바로 이 북종 가문의 종손이다. 남종 가문의 후예들은 아직 중국 대륙에 남아 있다. 남종에서 별도로 세운 공자 사당도 [[저장성]] 취저우에 남아 있다. 심지어 21세기가 된 현대에도 [[중국]]보다 [[대한민국|한국]]에 [[명나라|명]]·[[청나라|청]] 시대의 사료가 세세하게 많이 남아 있어서, 한국의 도움 없이는 [[유교]] 연구가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현재는 [[소중화|한국이 중국보다 오히려 유교 관련 문화를 잘 보전한 국가가 된 것이다.(...)]] 공자의 예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곽거병]], [[제갈량]], [[악비]], [[해서(명나라)|해서]], [[왕희지]] 등 '''중국사에 길이 남을 명사들의 무덤이 파묘되었고 기념물이 대규모로 파괴된 것은 물론이고 중국의 인쇄 및 무수한 기록과 자료가 유실되었다.''' 예를 들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국제인증을 받은 [[직지심경]]을 만든 [[대한민국]]보다 자기들 인쇄술[* 베이징에 있는 [[중국]] 제1 역사 당안관에 가면, 명청시대의 공문서라고 할 수 있는 당안이 1천만 건 넘게 보관되어 있을 정도다.]이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해도, '''그 증거가 없다.''' 외세 때문에 파괴된 것이면 할 말이나마 있지만, 본인들이 스스로 [[증거인멸]]을 한 셈이라 변명할 길도 없다. 그 와중에 [[자금성]] 내에서 소장 중이었던 [[청나라]] 황실이 수집한 최고급 문화재 중 69만여 점은,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가 [[국부천대|대만으로 튀면서]] 가지고 가버렸기에, 운 좋게도 [[홍위병]]의 광란 속에서 보존될 수 있었다. 문화재를 심히 아끼던 장제스가 중국의 문화적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먹튀]]한 것이 살아남았으니, [[결과는 좋았다|예상은 못했겠지만]]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해당 문화재들은 [[타이베이시|타이베이]]의 [[국립고궁박물원]]에 보관, 전시 중에 있다. 중국 내에 있던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도 문화대혁명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이 역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역사가 아닌 [[한민족]]의 역사라고 했기에 무사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식한 홍위병들이 유적을 중국 유적, 한민족 유적을 따져가며 신중히 파괴했을 리가 없었고 조선족이 문화대혁명 때 피해를 입었던 것을 보면 그냥 있는지도 몰라서 파괴하지 않았다는 해석이 옳을 것이다.[* 요즘에는 [[동북공정]]을 위해서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방치하거나 훼손시키거나 조작을 가한다. 가령 고구려 박작산성을 뜬금없이 만리장성으로 둔갑시켰다. ~~반면에 대만 독립파들은 중공정부마냥, 지들이 대만 원주민이라고 둔갑할겸, 필리핀은 대만영토라는 원조 [[대륙의 기상]]을 보여준다.~~] [[문화대혁명]] 후에 발견되어 살아남은 문화재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진시황릉]]이다. 1974년에 발견되었는데, 이때는 문화대혁명 초기에 있었던 광적인 [[반달리즘]]이 사그라든 상태였기에 파괴를 면했고, 그 압도적인 크기와 수량의 병마용이 보존되었다. 또한 [[미국]]으로 넘어간 일부 유물들도 보존되었다. 그리고 [[관우]] 숭배 사상 때문인지 관림 등 관우와 관련된 일부 유물들도 살아남았다. 사실 관우와 같은 경우에는 중국에서는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 당장 [[6.25 전쟁]]에도 관우의 후손이 참전한 전적이 있다. 이런 일을 저지른 [[홍위병]]이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원수냐면, [[명나라]] 말기의 명장으로 중국의 민족영웅 중 한 명인 [[원숭환]]의 무덤은 [[마오쩌둥]]이 심혈을 기울여서 보존하라고 지시했음에도 마오쩌둥을 따른다는 자들이 무덤을 파묘한 것이다. 또한 이 자들이 중국인들에게 [[평생까임권]]을 받은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남송]]의 명장 [[악비]]의 무덤과 상을 건드린 것이다. 악비는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한족]]의 영웅인데, 한족이라는 작자들이 악비의 무덤을 파묘해서 악비의 유골을 불태워서 가루로 만들었다. 그 때문인지 홍위병 출신들은 자신들이 홍위병 출신인 것을 숨긴다. 들키는 날에는 보복을 당하거나 먹고사는 데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이순신 장군 묘'''를 파묘해서 때려부순 셈이다.[* 당장 한 사채업자가 빚 대신 압수한 부동산과 유물이 이순신 사당과 그 유물이라는 것을 알고 식겁해서 이순신 장군 후손들에게 신고한 사례도 있을 정도인데([[https://www.fmkorea.com/index.php?document_srl=3672958421&cpage=1|#]]) 중국에서 이순신 장군급 위인으로 존경받는 악비의 묘를 파괴한 주동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답이 없을 정도이다.] 반대로 [[프랑스 대혁명]]의 경우, [[프랑스 제1공화국|혁명정부]]가 귀족, 교회의 고문서나 예술작품을 싹 다 긁어모아 창고에 보관했고, [[프랑스 혁명전쟁]]이나 [[나폴레옹 전쟁]] 등 이후에 벌어진 난리통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자료, 예술품이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중국 역사상 유명한 [[폭군]], [[간신]], [[역적]], [[탐관오리]]들의 무덤들 상당수는 이러한 파괴의 광풍 와중에도 파헤쳐지지 않고 멀쩡히 살아남았는데(대포적으로 [[조조]]의 무덤), 이는 후세에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오랫동안 방치되는 바람에 잊혀지거나, 사후에 있을 보복, 부관참시를 방지하고자 미리 가짜 무덤을 여러 개 만들어 진짜 무덤을 감추었기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