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악영향 (문단 편집) == 개요 == >'''"불파불립(不破不立), 선파후립(先破后立)"''' >"부수지 않으면 세울 수 없다. 먼저 부수고 다음에 세운다." >----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주석 [[마오쩌둥]] >[[청나라|청]]을 보고 싶다면 [[대만]]으로 >[[명나라|명]]을 느끼고 싶다면 [[대한민국|한국]]으로 >[[원나라|원]]이 궁금하다면 [[몽골]]로 >[[송나라|송]]이 그립다면 [[베트남]]으로 >[[당나라|당]]을 알고 싶다면 [[일본]]으로 > >~~~[[문화대혁명]]을 몸소 겪어보고 싶다면 [[북한]]으로~~~ >----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문화대혁명을 표현한 글 중의 하나로, 문화대혁명 당시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되면서 중국이 위에서 언급된 문명들의 발흥지임에도 정작 타국에 가야 해당 문화를 느낄 수 있다는 블랙조크다. 위 글에서 언급된 각 국가는 해당 시대의 전통을 잘 유지했거나 그때 서로 깊은 관계를 맺어 그 흔적이 남아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청대 문화는 [[대만청치시기]]를 거쳐 대만 전역에 퍼졌으며 [[중화민국]]이 [[국부천대]] 당시에 청대 유물을 싹쓸어 갔다. 명대 문화는 당시 사대문화를 통해 [[조선]]에 도착한 이후 [[대한민국]]에 잘 보전되어 있다. [[일본]]은 [[견당사]]를 통해 유입된 문물들이 잘 보전되어 있으며, 원나라야 [[몽골인]]들이 중원을 장악해 세운 나라고, 쌀국수와 같은 남송 식문화 등은 [[베트남]]이 유지하고 있다. 문화대혁명 시절 그 자체를 체험하고 싶으면 북한으로 가라는 추가적인 서술도 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 탓에 겪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했다. 고작 10년 만에 찬란했던 4천년 중국사와 중국 전통 문화 기반이 통째로 무너졌으며, [[한족]]뿐만 아니라 [[소수민족]]과 [[고구려]], [[발해]] 등의 유적들이 대규모로 약탈되거나 파괴되었다. 또한 [[중국/역사|중국 역사]]상 어떤 침략이나 전란도 [[문화대혁명]]만큼 [[중국/문화|중국의 문화]]를 파괴하지 못했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장제스]]가 [[국부천대]]를 할 당시에 중국 전역에 전해지고 있었던 수많은 문화재들을 옮겨놓지 않았다면, 또는 [[저우언라이]]가 사병을 동원하여 몇몇 문화재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 중국 문화는 많은 부분을 이야기로만 전해들어야 했을지도 몰랐을 정도로 소실됐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문화대혁명이 중국 문화와 전통에 끼친 영향의 크나큰 심각성을 짐작케 한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으로 일어난 문화 파괴 때문에 제 발을 저려서, 지금도 장제스가 문화재를 대만으로 [[먹튀]]한 것에 대해 뭐라 말 못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다. [[문화대혁명]]이란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면 아마도 [[르네상스]]처럼 '문화가 혁명적으로 발전한 시기를 말하나 보다'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라는 용어는 마오쩌둥과 [[홍위병]]들이 자화자찬하기 위해 만든 용어이며, 마오쩌둥 사후에도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의 권위를 무너뜨릴 수 없었기에 혁명이라 부르는 것일 뿐이다. 실상은 [[마오쩌둥|권력욕에 찌든 뒷방 늙은이]]가 자기 권력욕을 위해 인민들을 부추겨 4천년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중화 문명을 [[중국인]] 손으로 스스로 부숴버리게 한 초대형 [[반달리즘]]이었다.[* 마오쩌둥도 점점 심해지는 홍위병의 반달리즘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미 그 시점에서는 모든 것이 늦었지만 말이다.] 그 반달리즘의 규모와 철저함은 전 세계 역사를 둘러 봐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수준으로, 중국 문화 전반이 파괴되어 분야에 따라 수백~수천 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홍위병]]들이 저지른 폭력은 단순히 사람에게만 가해진 것이 아니라, 기존의 중국 문화 전체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수많은 문화 유산과 서적 등이 이때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고 소실되었다. [[음악]], [[미술]], [[영화]], [[체육]], [[소설]], [[만화]], 심지어 [[애니메이션]]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어이없는 정책과 숙청이 벌어졌고, 중국 문화계도 당연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굳이 중국인이 아니더라도 문화예술 분야에 조금이라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서술된 홍위병들의 수많은 반달리즘 행위에 대해서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특히 해당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화가 치밀어오를 수도 있을 정도의 만행이었다. 문화대혁명의 악영향은 오늘날 중국이 하드 파워는 충분하지만 [[소프트 파워]]는 [[미국]]과 비교하기도 민망할 수준의 [[넘사벽]]으로 밀리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끝난 지도 수십 년이 지났지만, [[중국 대륙]]의 문화계는 주변 국가인 [[대한민국]]과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대만]]이나 [[홍콩]]에 비해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열세인 것이 현실이다.[* 단순히 근현대 문화를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 문화가 주도하고 있어서라고만 보기는 어려운 것이, 한때 [[중국]]의 경제중심도시 [[상하이시|상하이]]는 20세기 초까지 [[아시아]]에서는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도쿄]]보다도 [[재즈]], 소울 등의 음악과 영화 등 각종 문화가 번성하고 앞서가는 도시로 주목받고 있었다. 단순히 세계 열강의 조차지라서가 아니라, 당시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중국 배우나 뮤지션들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오늘날 [[중화권]]의 문화 컨텐츠 중에 세계적으로 꽤 수준을 인정받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대만]]이나 [[홍콩]]/[[마카오]]에서 제작된 것들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중국 본토에서 만들어지는 문화 컨텐츠들이 변변치 않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대중음악 분야에서 확연한데, 인구가 13억 명이 넘는 중국 본토에서, 다 합해야 3천만 명 가량의 [[대만]], [[홍콩]], [[마카오]]와 경쟁이 될 만한 음원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중국 본토의 경제 규모는 익히 알려진 대로 무시받을 정도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지 오래이며, 이는 곧 중국 본토의 하드 파워가 뒤쳐진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소프트 파워의 무서움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경우 [[6.25 전쟁]] 이후 [[한강의 기적|본격적인 경제 성장]]으로 먹고살 만해진 1980년대부터 문화를 키우는 데도 힘을 쏟았다. 물론 독재 시절의 문화 육성은 [[3S 정책]] 같이 정치적 목적이 다분하긴 했지만, [[한류]]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도 1980년대까지는 독재 정권들이 집권했기에 소설가들이 경찰에 잡혀가 고문을 받거나 대중가요들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등 대중 문화에 대한 검열과 탄압이 매우 심했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정부의 검열과 탄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장 가도를 달렸던 시점은 1993년에 개봉된 헐리우드 영화 [[쥬라기 공원]]이 전 세계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 벌어들인 수익이 한국이 1년 동안 자동차들을 해외에 판매한 수익과 맞먹는다는 이른바 '[[쥬라기 공원]] 쇼크'로 인해서 한국도 그런 식으로 문화 상품들을 해외에 팔아서 수익을 벌어들임과 동시에 국가 이미지의 개선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리기 위해 영화나 드라마 및 가요 같은 대중문화에는 검열과 탄압을 엄격히 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1990년대 초반부터였다.]. 참고로 [[중국]]이 [[문화대혁명]]으로 입은 경제적인 피해는 대략 5천억 위안으로 추산하고 있다. 2019년 기준으로 볼 때 한화로 82조 600억 원 가량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중국으로써는 감당이 불가능한 피해액이 아니라지만 이건 [[중국/경제|중국의 경제]]가 발전해서 그런 것이고, 1970년대 중국의 경제규모와 위안화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큰 피해액으로 1980년 당시 중국의 총 GDP가 4588억 위안으로 추산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금액임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이 2020년 1년 동안 국정을 운영하는 예산으로 470조원 정도를 설정했는데, 갑자기 520조 원이 국고에서 증발해버렸다고 생각하면 피해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게다가 이 피해가 단발성이 아니라 중국의 소프트 파워에 영구적이고 엄청난 손상을 남겨 차후에 얻을 수 있는 경제, 사회적 부가가치까지 없애버렸다고 생각하면 피해 규모는 더욱 커진다. [[대약진 운동]]의 피해 규모와 합치면 대략 6천 2백억 위안에 달하는데, '''이는 [[중국 정부]]가 건국 이후 30년 동안 기반시설에 투자한 총액보다 큰 금액이다.''' 거기에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후발 국가들에게 하나하나 경제적으로 따라잡혔고, 또한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으로 도시 국가 규모인 [[홍콩]]의 경제력이 중국 전체 경제력의 최대 1/4까지 도달했으며, 1980년대 당시 인구가 2천만 명도 안 되는 [[대만]]에게 경제력의 40%를 따라잡혔고, 심지어 1991년부터 1994년까지 4년간은 인구가 12억 가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4400만 명 남짓이던 [[대한민국]]에게''' GDP의 무려 '''80% 이상'''을[* 참고로 [[세계은행]] 통계 기준으로 1987년부터 1997년까지는 한국 GDP가 중국 GDP의 50% 이상을 따라잡았으며, 그중 압권은 1993년으로, 당시 한국 GDP가 3,297억 달러였고 중국 GDP가 4,447억 달러였으니, 당시 한국 GDP는 중국 GDP의 '''88.3%'''를 따라잡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화궈펑]], [[덩샤오핑]]을 넘어 '''[[장쩌민]]이 집권한 시절인데도''' 이랬을 정도면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이 어떠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인 셈이다.] 따라잡혔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덤으로 중국의 1인당 GDP는 ([[UN]] 통계 기준으로) 1992년까지도 '''[[북한]]보다도 낮았다.''' 다만 이는 [[고난의 행군|북한이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처참히 몰락하기 직전]]이란 것은 감안해야 하지만, 이를 감안해도 문화대혁명이 얼마나 중국의 잠재력을 깎아먹었는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 내 모든 자산을 소모하고, 적지 않은 인민들에게 정신적인 후유증을 남긴 것은 물론이요 경제 및 문화 위상까지 크게 추락시킨 세계 역사상 최악의 [[반달리즘]]이었음을 입증하는 사건이다. 물론 문화대혁명이 없었다면, 악·폐습이 남아 중국 문화와 사회 발전에 상당히 저해되는 요소가 되었을지도 몰랐다는 시각도 있지만[* 예를 들면 [[전족]]이 있다. 물론 전족은 [[북양정부]], [[국민정부]], [[공산당]] 모두가 폐지하려고 노력했기에 문화대혁명 이전에 진즉 사라졌다.] 이미 힘을 잃고, 유산으로만 남아 있던 문화재까지 때려부순 것은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거기다 [[축첩]], [[남아선호사상]],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china_lab&logNo=220923492961|차부두어]], [[중국/인권|고질적인 인권문제]] 등 정말로 사라져야 할 악습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악화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