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 (문단 편집) == 문화대혁명의 내용 == 대약진 운동에 이은 2단 콤보 크리티컬 히트로 중국을 혼란에 빠트렸다. [[인간불신|사람과 사람 사이는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점철되었고]], 심지어 [[가족]] 간에도 서로를 믿을 수 없었다. 개인의 [[인권]]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전체주의|아버지가 마오쩌둥에 대해 아주 약간의 불만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면 아들이 그것을 공산당에 보고하고, 홍위병들이 와서 아버지를 타도하는 식의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 '''타도'''(打倒)란 말 그대로 때려눕힌다는 의미인데, 그냥 때려눕히는 게 아니라 이상한 모자[* 서양식 던스 캡(dunce cap)이다. 바보라는 뜻이다.]에 '더러운 [[자본주의]]의 [[개새끼|개]]' 따위의 글을 적어서 씌우고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 결박해 놓은 다음, 묶인 사람을 사람들이 와서 한 번씩 강렬하게 비판한 뒤 구타를 가하고, 외양간이나 화장실 같은 곳에 가두는 것을 말한다. 당해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 친분이 있거나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언어와 신체폭력을 집단으로 겪고 나면 [[트라우마|정신적으로 크나큰 상처를 입고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다]]. 피해자 중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혹은 이런 끔찍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예 미쳐버린 사람도 부지기수. 한 예로, 소설 《낙타상자》를 발표하여 마오쩌둥으로부터 '인민 예술가'라는 찬사를 받았던 소설가 [[라오서]]는 그가 [[런던 대학교]]에서 일했었단 이유로 반동으로 몰린 후 공묘로 끌려가서 베이징 제8중학교에서 몰려나온 여중생 홍위병들에게 놋쇠 버클이 달린 혁대로 수없이 구타를 당하고 굴욕적인 사진이 찍히자 정신적인 충격과 분노로 인해 자신이 어릴 적 살던 집 근처의 연못에 투신자살했다고 한다. 또한 그런 피해자 대부분은 원래 고위급 직책을 가지거나, 권위 있는 지식인 등 중국 사회의 엘리트들이었다. 정신이 멀쩡한 엘리트들이 그렇게 미쳐나가고 죽어가며 투옥되었기 때문에 중국 사회의 수없이 많은 인재가 사라져 버렸다. 더욱 더 끔찍한 사실은 마오쩌둥이 "자살은 인민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행위다." 라고 한 까닭에, 자살할 경우 그 사람은 [[장례식]]조차 공개적으로 치르지 못하고 쓸쓸하게 화장해야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국]], [[인도]] 등 일부 국가의 외교 공관들도 '반제국주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대사관을 불태우고 직원들을 끌고 다니며 두들겨팬 것. 서방 대사관은 말할 것도 없고 소련 대사관도 수정주의자 소굴이라고 포위를 당했고 인도네시아나 케냐, 몽골 대사관도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홍위병의 이러한 외교공관 공격 중에서 가장 스케일이 컸던 것이 1967년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이었는데 홍콩의 [[67폭동]]을 홍콩 당국이 무력으로 진압하자 홍위병들이 흥분하여 영국 대표부를 점령, 대표부 직원들을 억류하여 폭행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외교 문제가 발생했고, 나중에 심각한 국제적 고립에 몰려 혁명외교를 철회한 마오쩌둥은 방중(訪中)한 [[북한]]의 [[오진우]]에게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어떤 이들은 기회에 편승하여 소위 조반(造反)을 시도했다. 베이징에 있는 영국대표부를 불사르고 (중략) '''그런 사람들이 바로 국민당이다.'''"[* 최명해, 《중국·북한 동맹관계》, 도서출판 오름(2009), p.275] 극단적으로 문화대혁명에 앞장섰던 집단인 [[홍위병]]이 득세했는데, 이들은 대개 10~20대의 학생들이었다. 공통된 특징은 녹색 인민복과 모자, 무장 벨트, 마오쩌둥 어록을 착용한 채,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죄명을 씌워서 때리고 부수고 빼앗는 것. 중국의 청소년 대부분이 홍위병에 가담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에 대한 소회는 각각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이 시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재빨리 개념을 찾고 새 시대를 준비하다가, 개혁개방이 시행된 이후 외국에 나가서 성공한 사람도 있다. 따라서 간간이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30329033507624|반성]]을 하거나,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30821172707828|사과 글을 내는 홍위병들]]도 있긴 하다. 문화대혁명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알 수 있다. 홍위병 대다수는 꿈에서 깨지 못해서, 나중에 마오쩌둥이 농촌에서 노동하며 배우자는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을 제창하자, 그에 따라 모조리 시골로 내려갔고, 1980년대까지 그곳에서 사실상의 [[굴라그]] 생활을 하면서 인생이 사그라졌다. 사실 '''홍위병들의 입장'''에서는 그 당시가 '''[[리즈시절|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였다. 홍위병 중 초기 보수파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은 집단이었지만, 후기의 조반파(造反派)들은 대부분 못 배우고 가난한 계층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문화대혁명은 자신들이 자산가와 지식인들의 위에 설 수 있었던 유일한 시기였던 셈. 그들은 실제로 평소 높은 위치에 있던 이들을 끌어내려 두들겨 패고 그들이 향유할 수 없던 예술과 문화, 유적들을 파괴함으로써 본인들이 기존의 권위를 타파하고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믿었다. 하지만 홍위병들의 준동으로 만들어진 사회는 '''모두가 못 살고 모두가 못 배운 퇴보한 평등'''의 사회라는 점이 문제였다. [[우리나라가 네 수준으로 떨어진다면 이 세상은 끝이야!|즉, 사회 전체가 다같이 추락한 것이다.]][* 마오 사망 이후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공산주의 이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선부론"을 내걸고 노골적인 불평등성장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일반 중국인들에게 무리없이 받아들여지게 된 이유는 대부분이 문화대혁명과 홍위병들의 만행과 광기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도 한 10년쯤 지나서 불평등이 심화될 조짐이 보이자 1989년 [[천안문 사태]]라는 반발이 터져나오면서 최악의 대학살까지 벌어진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 뒷부분의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에 나온다. 게다가 홍위병들이 무슨 고대, 중세 시대에 농경민족 침략해서 교회나 절을 불태우면서 좋아하는 타민족 야만인들도 아니고, 자기들 문화재와 지식인, 전통문화를 다 부수고, 향촌 공동체나 사회는 물론 심하면 자기들 가족도 말아먹고는 그때가 자기들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라고 회상한다는 것부터가 심각한 문제이다. 또 권위타파와 만인평등이라지만, 문화대혁명 이후로 중국이 이 "[[하향 평준화|모두가 평등해진]]"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엘리트 계층을 재건하는 데 진땀을 뺐고 그 결과 현대 중국이 다시 "불평등"해졌으며, 그리고 현재 중국 공산당의 일당독재가 지속되는 중국에서 과연 권위주의가 타파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평등"도 허울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거기에다가 개혁개방 이후로 배금주의가 판을 치면서 다른 의미로 도덕관념을 상실했다는 의견도 있을 지경이다. 중국에서 부정적 의미로든 긍정적 의미로든 봉건적 잔재는 문화대혁명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수천 년을 내려오던 향촌의 유교적 질서도 완전히 뿌리뽑혔다.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예절을 중시하는 것을 본 중국인들이 놀라면서도 부러워하는 이유도, 문화대혁명 시절에 이런 것들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주요 책임을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이 주축이 된 [[4인방]]과 [[린뱌오]]에게 떠넘기고 있다. 문화대혁명을 시작한 마오쩌둥도 책임이 크지만, "'''음모를 꾸민 반혁명분자'''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게 대체적인 공식 결론이다. 중국 공산당에게 있어 근현대 중국의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는 마오쩌둥을 자신들의 입으로 직접 공격하여 현재 공산당의 집권 정당성마저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시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해 권력 일선에서 퇴진했으나, 그 뒤를 이은 [[류사오치]] 등의 실용주의 정치가들이 실권을 잡고 예전 자신의 과오를 수정하는 모습에서 권력에서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받고 심한 분노와 권력욕을 느꼈다. 이에 아직 자신에게 남은 정치적 카리스마를 악용하여 정, 관, 군부의 권력 중심에 있는 이들을 숙청하고 권좌를 재확립하고자,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선동된 군중과 4인방, 린뱌오 등을 이용해 '''자신이 세운 국가를 자기 손으로 망가뜨린 것'''이다. 그러나 4인방을 숙청한 덩샤오핑 등은 마오쩌둥의 권위를 등에 업고 세력을 유지하기를 원했으며, 군중의 비난도 피하고자 죄과를 은근슬쩍 4인방에게만 물었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 공산당]] 수뇌부를 비롯한 [[중국]]의 [[엘리트]] 중 [[이공계]](理工界) 출신이 많은 것도 문화대혁명의 영향이 지대하다. 문화대혁명 때 [[인문계]] 및 [[사회과학]]계에 대한 공격이 너무 크다 보니, 상대적으로 깔 거리가 적은 [[자연과학]] 및 [[공학]] 계열로 인재들이 몰렸던 것. 물론 문화대혁명 당시 이과 인재들도 고생했지만 문과 인재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수준이었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의 유력 파벌 중 중국 공산주의청년단(中国共产主义青年团)의 경우,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이공계 인재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중국의 [[인문학]]/[[사회과학]]은 이 때 피해를 너무 크게 입은 데다 이후에도 [[중국/문화 검열|중국 정부의 검열]]로 인해 발전 속도가 느리다. 때문에 같은 [[중화권]]인 [[홍콩]]이나 [[타이완]]의 학계가 더 높이 평가를 받는다는 말이 나올 지경. 물론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으로 보면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이 [[경쟁]]은 엘리트들의 전유물이라고 시험을 제거하고 추천을 통해서 대학에 입학시켰기 때문에 이공계도 망하긴 했었다.[* 따라서 문화대혁명 세대에는 추천을 통해 명문대에 들어가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나마 문화대혁명이 10여년 만에 마오쩌둥 본인의 죽음과 함께 끝나서 망정이지 만일 문화대혁명이 그 이상으로 길게 이어졌다면 역으로 '''마오쩌둥 본인의 역사적 평가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덩샤오핑]]이 집권한 직후 과거 마오쩌둥의 치적을 평가하면서 "마오쩌둥 주석은 공칠과삼(功七過三)의 지도자였다"라고 조금이나마 치켜세워준 결정적인 이유가 마오쩌둥이 비록 문화대혁명이라는 대재앙을 야기하기는 했으나 적어도 그 이전에는 각 지역 군벌들의 전횡으로 사분오열 되어가던 중국 대륙에서 군벌주의를 청산하고 중국공산당 하의 단일정부를 성공적으로 출범시켰다는 점이었는데, 그나마도 문화대혁명 후기로 가면 '''각 지역의 홍위병 수장들이 국가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군벌화 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마오쩌둥 본인이 비교적 일찍 죽어서 망정이지 만약에 마오쩌둥이 계속 장수하는 바람에 문화대혁명이 끝없이 이어졌다면 중국 각 지역에 홍위병 출신 군벌들이 할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랬다면 사태가 어떻게든 일부 수습된 이후 마오쩌둥에 대한 현대 중국인들의 평가 역시 그냥 [[천하의 개쌍놈]] 정도로 떨어졌을 것이다.--사실 중국을 더 쉽게 부수려고 통일한 게 아닌가 싶다-- --중국을 너무 사랑해서 많이 만들려고 했던 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