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 (문단 편집) == 배경 == [youtube(kXByOrRrO7c)] [[대약진 운동]]의 결과로 3천만~5천만 명에 달하는 중국 인민들이 [[아사]][* 정확한 수치는 아무도 모르고 학자별로 기관별로 추정치가 제각각이다. 다만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에 중국 공산당에서 대약진 운동의 피해를 조사했지만 너무 엄청난 숫자가 나와서 은폐했다는 증언이 있기도 하다. 최소 3천만 명 정도로 보더라도 1970년도 [[대한민국]] 총 인구수가 '''약 3천 2백만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말도 못할 사망자 수인 것은 틀림없다.]하고 경제가 나락으로 추락하는 파멸적인 결과가 초래되자 이를 강행한 [[마오쩌둥]]의 권위는 추락하여 사실상 2선으로 후퇴하면서 국정에서 배제되었다. 대신 [[류사오치]]가 국가 주석직을 승계해서 [[덩샤오핑]]과 함께 실용주의 정책을 펼쳐 중국 인민들의 호평을 듣게 되자,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자신이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될까봐 초조해했다. 물론 이 시기에도 마오쩌둥은 국부로서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고, 중앙군사위 주석으로 군통수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그를 거역하려고 하지는 못했다. 대장정과 [[국공내전]]을 통해서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내에서는 신과 같은 수준의 권위를 얻었기에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그 누구도 마오쩌둥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지는 못했다. 문제는 마오쩌둥 본인이 대약진 운동이라는 엄청난 대삽질을 저질렀기 때문에 다시 정치 일선에 전면으로 나설 수 있을 만한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불을 붙인 게 [[펑더화이]]였다. [[1959년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이 밀어붙인 삼면홍기(三面紅旗)[* 총노선(總路線), 대약진(大躍進) 운동, 인민공사(人民公社)를 가리킨다. 중국 경제를 말아먹은 마오쩌둥의 대표적 오점들. 사실 마오쩌둥의 의도는 좋았다. 이념, 즉 [[정신력]]으로 성장하는 경제를 더욱 빠르게 한 단계 도약시키려고 한 것. 하지만 워낙 공상적이고 허황된 목표였던지라 이를 실행하다가 오히려 경제를 망쳤다.]에 대해서 "'''총노선은 옳았으나 대약진 운동과 인민 공사는 잘못되었다.'''"라고 비판했다. 물론 펑더화이의 이 발언은 나름대로 마오쩌둥을 생각해서 한 [[충언역이|충언]]이었으나, [[괘씸죄|초조해져 있던 마오쩌둥에게 이 소리는 굉장히 귀에 거슬리고 고깝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펑더화이의 비판은 비판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매우 완곡한 표현으로 이루어진 한 통의 개인 편지였다. 단순히 "총노선은 옳았으나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는 잘못되었다." 라는 표현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매우 상세한 설명과 예시를 들어가면서 칭찬과 부족한 점을 차분한 어조로 언급했던 것이다. 그 예로 "전 인민들의 철강생산 중에 [[토법고로|수많은 흙으로 만든 용광로를 만들어 많은 자원과 인력을 낭비하였다]]. 이는 당연히 커다란 국가적 손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운동을 통하여 전국의 지질에 대하여 대규모 조사를 하였고, 또 적지 않은 관계 부문의 전문가를 양성하였으며, 많은 간부들도 이 운동 기간 중 단련을 하였다는 점은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평가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마오쩌둥이 펑더화이의 비판을 받았다는 것에서 너무 감정적인 사실 왜곡은 조심해야 한다.[* 출처: 김재선, <모택동과 문화대혁명>] 하지만 수신인인 마오가 최고 권력자였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사실 칭찬은 한 톨도 없는 게 맞긴 했다. 전국의 지질조사나 전문가 경험치 획득 등은 [[팩트폭력|그냥 있는 사실만 쓰자니 잘못했다는 말밖에 없어서]] 듣기 좋게 집어넣은 빈말일 뿐이고, 마오가 그걸 못 알아들을 만한 위인도 아니었다.[* 젊은 시절 부농의 아버지 밑에서 회계사 노릇도 해보고 베이징대 사서도 해보았으며, 한 줌의 공산당을 이끌고 끝끝내 대륙을 장악한 인물이다. 저 정도도 못 알아먹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어쨌든 마오는 이 편지를 읽고는 펑더화이에게 '''"이 자산계급 민족주의자야!"'''라는 거의 폭언에 가까운 말을 쏟아내었고, 펑은 잔뜩 쫄아 깨갱하면서 물러나야 했다.[* 손쉽게 풀이하자면 극우부르주아라고 부른거다. 이 폭언의 수준은 굉장히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충성으로 모시던 사람에게 충언을 올렸는데 이런 폭언이 돌아온 것이다.] 결국 이로 인해 펑더화이는 실각하고, 마오는 자신의 최측근인 [[린뱌오]]를 펑더화이의 후임 국방부장으로 임명하였다. 게다가 삼면홍기(三面紅旗)에 긍정적이었던 류사오치조차도 고향 [[후난성]]을 시찰한 후 상상을 초월하는 사태를 보고 경악하여 [[7천인 대회]]를 소집하여 마오의 주장인 공9과1의 평가를 정면으로 뒤집고 '''"천재지변이 3할이면 인재가 7할이다."'''라며 마오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분노한 마오는 류사오치의 말을 막으면서 실패는 일부 지역에 국한된다고 반박했지만, 류사오치는 오히려 성공이 일부 지역에 국한될 뿐이라고 맞서고 마오를 개인적으로 만나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고 소리를 지를 정도로 격렬하게 맞섰고 논쟁을 하며 싸웠다. 둘은 곧 진정하고 화해하기는 했지만 마오는 류사오치가 자신이 죽은 후에 중국에서 수정주의를 이끌 중국의 [[니키타 흐루쇼프]]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류사오치는 1959년 4월 27일 국가주석에 올라 덩샤오핑과 함께 정돈사업이라 불리는 경제개혁을 추진하며 강제적인 집단화 추진 정책이던 인민공사(人民公社)를 일부 후퇴시키고, "'''생산보다 구매가 더 좋고, 구매보다 대여가 더 좋다.'''"라는 말을 남기며, 실용적인 경제정책으로 마오의 자급자족 경제정책을 대체하려 했다. 사실 마오쩌둥도 공동식사를 비롯하여 자신이 제시한 과격한 집산화 정책이 터무니없고 오히려 악효과만 많은 것임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죽고 나서 스탈린처럼 위상이 격하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있었다. 결국, 마오쩌둥의 눈에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중국에서 자본주의 노선을 부활시키려는 '주자파'로 보였을 뿐이었다. 류사오치는 자신이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서 중국을 영도할 새로운 지도자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마오쩌둥을 뒷방 늙은이로 만들고 자신이 실세가 되려 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실은 마오쩌둥의 [[정풍운동]]이나 [[반우파 투쟁]]을 벤치마킹하여 공포정책을 반대파를 숙청함으로 당내에 입지를 확보하려는 것이 류사오치의 생각이었다. 이 과정에서 류사오치는 <공작조>를 조직하여 대약진 운동의 참혹한 실패로 정권과 체제에 의심과 회의를 보이는 민중을 가혹하게 탄압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집중적으로 타격당한 인물들은 바로 베이징의 대학생들이었다. 특히 칭화대학의 학생 [[콰이다푸]]는 공개적으로 류사오치를 비판했다가 류사오치에게 우경 기회주의자로 몰려서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다. 이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류사오치 정권에 대한 극도의 불만과 분노가 퍼졌는데 마오쩌둥은 이를 노리고 학생들에게 접근, 콰이다푸 등 학생들을 영웅으로 내세우며 류사오치를 비판했다. 여기에 [[장칭]]과 [[천보다]], [[린뱌오]] 등 당내 좌경세력이 마오쩌둥을 결사옹위하며 덩샤오핑과 류사오치에 대한 비난을 쏟아부으며 류사오치 세력을 회치기 위한 준비가 착착 갖춰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