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 (문단 편집) == 문화대혁명 [[홍위병|부역자들]] == 중국 문화대혁명에 적극 협조한 자들은 ‘35/45세대’였다. 이들은 1935년에서 1945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였다. 베이징 홍위병들을 지도한 조반파(造反派)의 5대 리더 중 4명이 35/45세대였다. 5대 영수는 베이징대 강사 녜위안츠(聶元梓·1921년생), 칭화(淸華)대 4학년 콰이다푸(蒯大富·1945년생), 베이징사대 조교 탄허우란(譚厚蘭·1937년생), 베이징항공대 4학년 한아이징(韓愛晶·1945년생), 베이징지질대 석사생 왕다빈(王大賓·1944년생)이였다.[* 그나마 이들은 몰락이라도 한 편이다.] 홍위병에 부역하여 대중들을 파멸과 광기로 이끌며 중국 사회를 세뇌시키고 비방하였던 대학생, 지식인들의 일부는 시간이 흐르자 하나둘씩 태세전환하며 오랜기간 자신들의 홍위병 경력과 홍위병 당시 만행들에 대해 침묵한다. * 쑹빈빈(宋彬彬)[* 중국 공산당 8대 원로 쑹런충(宋任窮)의 딸.] 가장 먼저 홍위병으로 봉기했으며, 8월 18일 100만 명의 홍위병이 운집한 대회에서 마오쩌둥이 홍위병 완장을 채워주었던 칭화대 출신 여학생이다. 마오쩌둥이 빈빈의 이름을 물어본 후, 이름이 봉건적이라며[* [[논어]] 옹야(雍也)편의 구절인 “문질빈빈, 연후군자(文質'''彬彬''', 然後君子)"(겉의 꾸밈과 본질이 조화를 이룬 후에야 군자이다)에서 유래한 이름.] 야오우(要武: '무장투쟁을 한다)로 개명하라고 한 적도 있다. 정작 그녀는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우디르급 태세전환]]을 시전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989년에 [[MIT]]에서 공학박사를 받고는 미국 [[메사추세츠]]에서 환경 분석관으로 일하다가 2003년에 본토로 돌아와 영국계 기술 개발 회사의 회장이 되는 등 [[권악징선|출세가도를 착착 밞아나갔다.]][* 일각에선 정신 차렸다고 하는데 쑹빈빈 개인이 정신을 차린 건 사실이나 이건 결코 긍정적 의미로 정신차렸다는 게 아니다. 본인은 마오쩌둥에 부역하여 중국 시민들과 홍위병들을 대상으로 [[선동]]질이란 선동질은 죄다 해놓고 정작 본인은 쏙 빠져나간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하판락]]이 풀려난 후 경찰 일을 하지 않고 사업가가 된 것도 정신을 차린 셈이 돼버린다.(...)] 쑹빈빈은 홍위병으로 베이징사범대부속여자중학교의 문화대혁명을 주도하여 1966년 6월 2일 붙은 대자보에 참여했으며, 선생님들을 구타하는 폭력에 대해 수수방관[* 말렸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책임회피이다. 본인도 말렸다는 주장 이후에 바로 둘러싸고 있던 학생들이 흩어진 것을 보고 별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저도 자리를 떠났었다고 시인한다.]하였다. 이에 볜중윈 부교장이 [[고문]]당하고 이후 몽둥이질에 맞아죽었는데[[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48729.html|#]] 이때 거행된 인민재판의 주동자 중 1명[* [[https://news.joins.com/article/20060471|출처]]]이었고,[[https://m.chosun.com/svc/article.html?sname=premium&contid=2014011402767|#]] 당시 잘못했다고 이후 소극적으로라도 사과를 한 것은 그나마 다행으로 보이지만, 쑹빈빈 역시 집회를 주도하고 군중의 광기를 유도하며 이후 인민재판 거행에도 영향을 끼친 주제에 부교장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자기는 억울하고 조사 결과 자기는 깨끗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한 것은 사과의 진심을 의심하게 한다. 대혁명 이후 수십년 간 침묵해오다가 2014년 문화대혁명 사과 열풍에 슬쩍 끼어들어서 면피성 사과를 한, 같잖은 사과 뿐이기에, 문화혁명 당시 학생들의 구타로 사망했던 볜중윈의 남편은 '''"쑹빈빈과 류진의 허위 사과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며, 부인 볜중윈이 죽은 지 48년이 지났지만 당시 일을 계획하고 사람을 죽인 이들은 여전히 법을 어기고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비판했다.[[https://www.yna.co.kr/view/AKR20140201024500074|###]] * 천샤오루(陳小魯)[* 1947-2018. [[2월 역류]]로 실각한 천이 외무부총리의 3남. 인민해방군에서 장교로 복무하다 전역 후 [[ABL생명|안방보험사]]를 창립했으나, 2018년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베이징 8중학에서 학교 책임자들과 교사, 동료 학생들이 비판투쟁과 노동 개조를 당하게 만든 주역. 당시 학생들을 이끌고 일부 교사들을 폭행했으며, 반혁명 혐의에 대해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이때의 혼란 속에서 이 학교의 화진(華錦) 당서기와 교사 한 명이 심적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고, 당 부서기도 학생들에게 맞아 평생 장애를 얻었다.] 본인도 이 사실을 직접 시인하고 사과했다. 당시 문화대혁명 초기 조반파에 적극 가담했고, 학교 책임자들에 대한 비판투쟁도 조직했던 것에 대해 늙은 보수로 낙인찍히고 문혁에 반대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무서워 인도주의를 위반한 핍박 행위를 제지할 용기가 없었다고 변명하였다.[[https://www.mk.co.kr/news/world/view/2013/08/745167/|(매일경제)][中혁명원로 천이 아들 "文革 과오 사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