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 (문단 편집) == 한국과 북한 ==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큰 이익을 봤다는 호사가들도 있다. 류사오치가 중심이 된 실용주의 정책은 외부 자본을 대거 유입하고 내부 경제도 활성화시켜 이제야 겨우 경제 성장에 착수한 상황에서 모든 기회가 중국으로 빨려 들어가 [[한강의 기적]]이 좌절될 수 있었는데, 마오쩌둥이 때맞춰 나라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나라 문을 걸어 잠그는 바람에 그런 사태를 맞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논리이다. 경제학계에서 '''"한국은 경제대국으로 가는 막차를 탔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거진 문혁을 빗대어서 하는 말이다. 성장 단계에서 경쟁국가로 중국이라는 괴물을 피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중국이 경제성장을 본격화한 1980~1990년대 당시, 동남아시아 주요국 역시도 고도 성장을 이어가며 한국의 뒤를 이은 신흥국으로 떠올랐으나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와 더불어 2000년대 이후 벌어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산업 공동화' 현상이 벌어지면서 중진국 함정에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1960년대는 아직 냉전의 절정기였기에 공산당 체제하의 중국에 대규모의 서방자본이 유입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고, 게다가 서방이 중국 "대신" 한국에 투자를 결정할 정도로 한국의 여건이 좋았다거나, 동아시아에 투자처를 찾고 있었다는 전제 자체에도 당시 한국의 발전상황을 보았을 때 무리가 있다. 당시 아시아 투자에 있어 최우선적인 국가는 일본이었으며 그 다음을 보더라도 필리핀이 더욱 지명도가 높았다. 한국에서는 1960년 외자도입촉진법을 공표하는 등 외자를 유치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규제가 심하고 정치적 불안과 외자유치 노력부족으로 1960~1965년까지 단 한건의 외자도 유치하지 못했다. 이후 1966년의 외자도입법을 기점으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1970년 수출자유지역조치법 등 좀 더 외국 자본 유입을 촉진하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결국 1970년대 초반에는 외국인 투자가 잠시 증가를 보였으나 자본의 일본 편중이 심했고 자본이 실제로 정부가 원하는 중공업에 투자되지도 않았던지라 정부가 원하는 산업에 마음대로 투자할 수 있는 해외차관이 훨씬 선호되며 결국 1973년, 다시 규제 정책으로 선회하게 된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이 모든 면에서 크게 후퇴하여 이로 인해 한국이 경쟁자가 사라져서 한국이 반사이익을 봤다는 주장이라면 일리가 없지는 않겠지만, 한국의 발전이 오로지 중국의 경제적이나 사회적인 후퇴 때문에 가능했다는 주장 자체가 너무 극단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위에서도 조금 언급했듯 이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중화 문명'의 유산이 중국 본토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남는 현상이 발생해버렸다. 가령 유교 서적, 의례 등도 중국 본토에 있던 게 워낙 많이 훼손된 바람에 한국 학계의 지원을 받아서 복원하는 형편이다. 한편 북한의 경우 1966년 9월 15일자 <로동신문>을 통해 이 사건을 '좌파 기회주의'라고 비난하자, 중국 홍위병들은 오히려 분노하며 대자보를 통해 김일성과 그 측근들을 성토했다.[* 출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개정판)> - 김성보-기광서-이신철 공저 /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웅진지식하우스. 2013. p226.] [[김일성]]이 이걸 계기로 중소 관계가 나빠진 틈을 이용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제대로 된 경제 성장을 통해 소련 입장에서의 대(對)중국 견제에 필요한 기반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바꾸고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국]]과의 단독 전면전을 위한 군비증강과 우리민족끼리 산업화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했고, 여기에 실질적인 전제군주제를 전면 도입하면서 나라 전체를 문혁 시절로 돌려놓았다. 실제로 문혁 시기를 보낸 중국인들은 북한을 보면서 향수를 느낀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영화계와 공연예술계가 쑥대밭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1970~80년대에는 북한 영화나 가극이 중국에서 크게 인기를 끌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70년대 중국에서 크게 히트를 친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가 있다. 영화로 먼저 제작되어 중국 전역을 돌며 상영될 당시 문화대혁명에 지친 중국인들의 문화적 갈증을 풀어주며 [[http://www.arko.or.kr/home2005/bodo/sub/north_news.jsp?idx=894&pidx=793|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암표가 5~10배 가량 비싼 값으로 거래될 정도였다. 2000년대 이후 북한 예술단이 중국의 극장에서 공연을 할 때 중국인들이 공연을 구경하러 오는 이유가 중국 중, 장년층이 그 당시 중국에서 인기 있던 북한산 공연에 대한 향수가 있으며 당시 중국에서 상영하던 북한 영화, 가극에 등장하던 북한 배우들을 보기 위해 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