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 (문단 편집) == 문화대혁명에 대한 다른 관점 == >관료특권계급의 사유화는 그들이 공동집권한 이후 그들 권력의 크기에 따라서 인민의 피와 땀을 강탈하고 공유제 사회의 필요한 생산을 독점하여 특권화하고 그 특권을 자본화하여 착취하는 것이다. > >-중략- > >"마르크스주의는 교조적인 것도, 정체되어 죽은 것도, 어떠한 불변함의 학설이 아니라 살아있는 행동의 지침이다."(레닌 전집[列宁全集] 17권 25쪽)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단순 복술(점치기)가 아니라 행동이다. >---- >천얼진 - [[https://www.marxists.org/chinese/reference-books/chenerjin-1974/index.htm|특권론(特权论)]] 제 1장 '''수정주의''' 및 제 2장 '''반수방수'''[* 수정주의를 막고 방지하다.] 中 물론 문화대혁명은 문화를 분명히 파괴한 전과도 있으며 [[지식인]]이 탄압당한 것 역시 맞지만 과연 그것이 문화대파괴니, 학살의 현장이니, 광기의 편장이니로 표현하기에는 문화대혁명의 시기는 길고 또 그 분파가 너무나 다양했다. 이 당시에는 수많은 파벌들이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급진적 [[마오주의]]자들이였던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등을 이끈 급진적 조반파, [[마오쩌둥]] 그 자체를 숭배하는 성격에 가까웠던 주자파, 마오주의적 농촌체제가 아닌 보다 도시적인 체제를 원하여 조반파와 같이 연합했던 도시 노동자 등 그 파벌은 한 둘이 아니며 이들이 했던 행동, 원했던 방향은 모두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대혁명은 단순히 문화의 파괴만을 말했던 시기가 아니였고 새 문화의 창조의 장이기도 하였다.(물론 이것이 기존 문화가 탄압을 받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특히 [[애니메이션]]과 [[리얼리즘]] 예술이 그 최고봉으로 울안에서 크는 죽순의 경우 중국 최초로 수목화 기법과 컷 아웃 기법을 사용한 [[애니메이션]]이였고 [[낭만주의]]적 [[사실주의]] 작품 또한 천이페이(陈逸飞)와 같은 인물 등을 대표로 발전하였다, 중국의 예술, 문화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문화대혁명을 빼고는 그 발전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고 갸오샤오화(高小华)의 작품처럼 문혁이 끝난 뒤에도 문혁이 남긴 예술적 영향을 완전히 무시하기 힘들다. 그리고 나아가서 문화대혁명은 거대한 [[민주주의]]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는 [[대약진운동]]이 [[스탈린주의]]적 중앙집권 개발로 변질됨에 따라 농촌은 물론 도시 노동자들이 '''이건 [[공산주의]]가 아니라 그냥 관료들의 자본주의 아닌가?'''라는 불만이 터저나온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린 우리 농장, 우리 공장, 우리 마을을 우리 손으로 [[직접민주주의]]에 의거해 굴리는게 공산주의고 마오주의라고 배웠는데 니들 하는 꼬라지가 뭐냐?'''라는 불만심이 결국 [[대약진 운동]]으로 터지고 만 것이다. 특히 문화대혁명 초기[* 극초기는 관료들의 지식인들이 먼저 선수처 이 불만을 잠재우고자 하였다. 지식인 탄압이나 문학인 탄압이 바로 이 극초기 관료들의 의해 일어난 사태이다.]에는 도시 노동자와 농촌에서 상경한 농민들이 [[반수정주의]]라는 이름아래 뭉친 조반파가 그 주축이었는데 이들은 [[마오주의]]를 지지하면서 마오주의를 배반한 [[공산당]]과 [[마오쩌둥]]의 부패, 비리, [[반민주주의]]적 관료독재 체제를 비판하며 그들이 독점한 권력을 대중에게 다시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오쩌둥은 처음에는 이들과 함께 움직이며 무너진 자신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고 주자파라 불리우는 마오쩌둥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이들도 키워나가며 조반파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양시광(楊曦光), 왕시져(王希哲)와 같은 조반파들은 [[공산당]]을 [[자본주의]]만큼이나 비판하며 '''민주주의란 대중이 [[공산당]]을 통제하여 관료의 대한 임명권, 해임권을 모두 쥘 수 있어야한다.'''라고 주장하며 진정한 [[민주주의]]는 [[생산수단]]의 공유화가 필수적으로 이루어저야한다며 [[관료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였고 천얼진(陈尔晋)의 경우에도 특권론(特权论)과 같은 문건을 작성하며 [[관료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즉 문화대혁명의 가장 격렬한 논쟁점은 [[문화]]가 아니라 바로 [[관료주의]]와 [[공산당]]의 대한 대중의 역할이였다.''' 그러기 위해서 이들은 대학교육을 특권계급(특히 관료)가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 모두에게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야학]]을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노동자]], [[농민]]들이 일을 끝내고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이후로도 사회생활과 전문교육을 합동시켜 [[학교]]에서부터 [[직접민주주의]]를 체험할 수 있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교사의 대한 반대권이나 반박권을 학생에게 주어 교사가 절대적 권력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일이 대표적이였다. 하지만 [[마오쩌둥]]과 주자파와 조반파간의 사이는 계속하여 나빠졌으며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을 시작으로 둘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조반파는 격렬하게 나아가며 아예 [[파리 코뮌]]을 토대로 한 상하이 코뮌을 건설하여 중화 최초이자 최후의 [[직접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이를렀고 [[장춘차오]]와 같은 이들은 이러한 [[코뮌]]을 옹호하며 '''아예 [[인민해방군]]은 물론 [[공산당]]과 [[국가]] 그 자체를 폐지하여 완전한 무국가 무계급 공산주의 사회로 즉각 이행되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허나 마오쩌둥은 자신의 허락없는 중앙과 [[공산당]]에 반대되는 지방의 독단적 행태를 비난하며 상하이 코뮌을 강제로 상하이 인민위원회로 만들어 중앙에 복속하게 만들었고 마오쩌둥은 상하이 코뮌을 군사적으로 무너뜨렸고 조반파와 주자파는 전쟁관계에 놓이며 결국에는 주자파가 마오의 후원아래 조반파를 몰아내며 문화대혁명을 이끌었고 이들조차도 결국은 마오쩌둥이 하방시키며 문화대혁명이 끝이 났다. 물론 문화대혁명은 그동안 억압받았던 [[농민]], [[노동자]]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저나온 사건이기에 매우 급진적이고 준비되지 못하게 일어났다. [[학교]]의 경우도 그들이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학구열에 불타는 교사와 학생간의 토론을 통한 발전이 아니라 '''농촌, 공장에서 이렇게 안되던데요?'''하며 무작정 이거 교육 개떡같이 한다고 하며 교육을 거부하는 일이 터저나왔고 [[직접민주주의]]적 원칙에 따라 만들어졌던 인민공사, 지방자치 역시 중앙의 개입과 미숙함으로 인해 어중간하게 이루어지며 이도저도 못한 채 [[공산당]]이 접수하는 등 온갖 시행착오와 사건이 터저나왔다. 실제로도 문화대혁명에서의 과장이 심하게 된 비판들 역시 바로 이 시기였다. 결국 문화대혁명은 [[천안문 사태#s-2|1차 천안문 항쟁]]처럼 [[마오쩌둥]]이 [[홍위병]]을 이용하려함을 깨닫자 그들을 공격하였고 그들의 권위와 관료주의 아래 무너져 [[중화인민공화국]]은 그 이후로 계속하여 [[공산당]] 관료주의 체제가 이어지게 되는, 문화대혁명은 [[민주주의]]의 피눈물 섞인 비극의 장이 되어 끝났다. 이 문화대혁명의 유산은 [[천안문 6.4 항쟁|2차 천안문 항쟁]]으로 이어지며 그 당시 조반파들이 말했던 대중이 당을 직접 통제하여 비리, 부정 부패를 없애자는 주장이 이어지며 문화대혁명의 유산이 계속해서 이어젔지만 현재 중국에서는 [[마오주의]]가 금지가 되었다.[* <중국식 민주’의 역사적 형성과 의미> 이홍규 저][* 중국 농촌합작체계의 형성과 전개(1919-출처 중국 애니메이션과 모범극의 상관관계 연구- 문화대혁명 시기의 미학 원칙을 중심으로 - 공덕외중국에서 ‘사회주의적 민주’ 논쟁을 통해서 본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백승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