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천상 (문단 편집) == 기타 == * 오늘날 [[악비]]와 더불어 충절의 표상으로 숭앙받고 있으며, 남송 정권에게 있어 그 양끝에 있었던 이 둘은 남송에게는 실로 과분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사대부를 존중해줬던 송나라이기에 악비와 문천상같은 걸출한 영웅들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고 할 수 있겠다. 정작 다른 통일왕조들은 내부가 썩어 자멸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수민족의 독립의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도리어 한족의 민족영웅을 격하하는 중국 정부의 정책 때문에 평가가 모호해진 점은 악비와 비슷하다. * 사실 송나라 말기의 주요 [[악당]]으로 꼽히는 인물들은 보통 북송의 [[진회]]나 남송의 [[가사도]] 정도인데, 진회의 경우 악비를 비롯한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 큰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어쨌건 송에 대한 충성심만은 나무랄 데가 없었고 재상으로써 저지른 정치적 과오 역시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동기나 목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해줄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군사력에서 우위를 가진 유목제국에 가까웠던 금나라에 비해 정주제국 송나라의 우위는 문화/경제력에 있으므로 섣부르게 전면전을 거는 군사적 모험을 하지 말고 지구전으로 국력을 축적하며 상대가 빈틈을 내보이는 기회를 기다리자는 복안 자체는 충분히 합리적이다. 다만 무조건 자기만 맞다고 반대파를 때려잡으면서 유능한 군사지휘관까지 숙청해버렸으니 복안이 맞고 그르고를 떠나 선을 넘었다는 것.) 또한 가사도의 경우도 좀 많이 찌질하고 무능한데다 권력을 잡기 위해 속임수도 아랑곳하지 않던 인물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나라를 배신하고 팔아먹지는 않았고, 그 능력 역시 재정을 정비하고 부패한 관료나 군인들을 처벌하며 학자들을 등용하였으며, 태학생들의 정치 개입을 금지하는 등 내정에서는 나름 괜찮은 성과를 낼 정도는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게다가 주변인들의 평가 역시 정치적 앙숙이었던 [[문천상]]에게 [[악주 전투]] 당시에 용맹하게 잘 싸웠다는 점은 인정받았다거나, 심지어 적국의 수장인 [[쿠빌라이 칸]]에게 "나도 저런 부하 하나 갖고 싶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강서안무사로 재직 중에는 [[남송]]의 [[명장]] [[맹공]]이 죽기 한 해 전 그의 후임 [[경호제치사]]로 추천받았고, 또한 [[쿠빌라이 칸]]이 가사도로 인해 투항했다고 주장하는 [[남송]]의 항장들 앞에서 가사도를 추켜세웠으며, [[염희헌]]이 악주 전투를 회상하였을 당시 쿠빌라이에게 "폐하께옵서 신료들 앞에서 '나는 어찌하면 가사도같은 자를 얻어 장수로 쓸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사옵니다."라고 말하였을 정도로 그리 무시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결국 "문약하고 무력한 송나라"라는 역사적 편견때문에 악비나 문천상같은 인물의 영웅적 면모를 두고 "송나라에게는 과분한 인물들이었다"라는 식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상 송나라의 멸망기를 보면 송말삼걸과 같은 비범한 포스를 보인 히어로도 있고, 왕조가 300년간 우대하고 양성한 사대부의 상당수 및 20만명에 이르는 백성들이 더이상 승리의 희망조차 갖기 힘든 최후의 전투까지 나라를 버리지 않고 함께한데다 국내의 악역을 손꼽으려 해도 나름 재평가의 여지가 있는 진회나 가사도정도밖에 내세울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최소한 송나라는 자국 내 인재들의 충성을 받아냈다는 점에서는 최후까지 아쉬움 없는 멸망의 미학을 관철한 셈이다. 다른 중국 왕조의 사례들과 비교해보자. [[춘추전국시대]]나 [[오호십육국]] 시대 같은 분열의 시기야 말할 필요도 없고,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수립했지만 [[조고]]라는 간신으로 인해 고작 3대만에 말아먹은 [[진나라]], 권모술수를 통한 권력 장악에 유능했던만큼 자국을 거덜내고 말아먹는데도 유능했던 [[한나라]]의 [[십상시]], 멀쩡히 조정이 임명한 절도사인 [[안록산]]과 [[사사명]]의 반란으로 거덜나기 시작한 당나라, [[오삼계]]라는 탁월한 배신자를 배출한 [[명나라]]에 비하면 송나라는 멸명의 순간까지 최소한 자국의 중신들에게 배신당하지는 않았다. 항복한 중신들 상당수도 대부분 저항하다가 더 이상 방법이 없고 무의미한 희생만 늘어나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리고 원의 항복 권고를 받고 나서야 항복했다. * 현대 중국에서 그는 애국주의, 정의, 폭정에 대한 저항의 대중적인 상징이다. 후대에의 대표적인 예로 [[1908년]] 하이펑 현에 있는 문천상의 역사적인 사당에서 [[천중밍]]은 30명 이상의 마을 청년들을 설득하여 국가 혁명을 위한 비밀 지원을 맹세한 적이 있다고 한다. * 용모가 준수했으며, 집에 많은 처첩과 악사들을 거느렸고 멱을 감으며 [[장기(보드 게임)|장기]]를 두는 취미를 가졌을만큼 불굴의 충신이라는 이미지와 언뜻 안 어울려 보이는 호화현란한 사생활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또한 임안으로 몽골군이 육박한 와중에도 친구들과 뼈있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실속 없는 엄숙주의를 배격하면서도 공사구분이 대단히 명확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긴 재상이요 충신이라 하여 항상 도도하고 고결한 모습만 보여줄 수는 없으니, 그의 자연스러운 본디 모습은 도리어 이상할 것 없다. 제나라의 명재상 [[관이오|관중]] 역시 제환공 급으로 사치도 누리고 결혼도 3번이나 했다.] * 문천상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명장 [[맹공]]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고 덕분에 유일하게 그가 존경하면서도 동경하는 인물이 [[맹공]]이었다고 한다. 훗날 의병을 이끌고 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맹공의 묘에 찾아가 잠들어 있던 맹공의 묘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신을 어렸을 때부터 존경해왔다. 당신을 생각하면 남송을 끝까지 지킬수 있을 것 같다." * [[조선]]의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문천상이 정말로 완벽한 충신이었다면 왜 원나라 군대에게 사로잡힌 뒤 [[애산 전투]]의 결과를 들었을 때 자결하지 않고 그 뒤로도 5년을 더 살아있었느냐고 비판했다.[* 실제로 유몽인 본인은 [[광해군]]에게 그리 중용되지 못했음에도 [[인조반정]]을 거부하고 광해군의 충신으로 남아 사형당했다.] * 장각이 중경 지역에서 몽골군과 투쟁을 벌이고 강에 빠져 자살하려다 실패하고 대도로 압송되던 와중에 측간에서 자살한 것을 치하하였다.[* 도제치사 장각을 지었다고 한다.] * 문천상에게는 문벽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원나라에 투항하였고 훗날 문천상을 설득하기 위해 파견되기도 하였으나 문천상은 그를 별로 질책하지 않았다. 문벽이 투항할 당시에는 형세가 이미 기울어진 판국이라 결사항전 해봤자 백성들만 보복 학살을 당하게 되고, 개인적으로는 가문의 후사를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똑같이 항복한 여문환에게는 그를 역신이라는 말까지 쓰며 강력히 비난했다고 한다.] * 문천상은 두 아들이 일찍 죽자 동생의 세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 그들의 후예가 현재 [[장시성]], [[후난성]], [[하이난성]], [[광둥성]], [[푸젠성]], [[홍콩]] 및 해외 지역에서 문씨 가문의 분파를 이었다. 문천상의 사촌동생 문천서(文天瑞)는 문천상이 죽고 몽골의 추적을 피해 오늘날의 [[홍콩]] 인근으로 도주했는데 그의 후예가 홍콩의 오래된 유력 가문 중 하나인 신계 문씨(新界 文氏)가 되었다고 한다. * 문천상의 사당은 중국 각지에 존재하며 대만 [[신베이시]] 솽시구에는 대만에서 유일하게 송말삼걸을 모시는 '삼충묘'도 있다. 그외 [[태국]], [[말레이시아]] 등에도 현지 [[화교]]들이 세운 그의 사당들이 존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