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종(고려) (문단 편집) == 평가 == >“'''현종(顯宗)·덕종(德宗)·정종(靖宗)·문종(文宗)께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혹은 형이 동생에게 왕위를 잇게 함으로써 근 80년 동안 국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문종은 근면과 검약을 실천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했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가능한 한 관대한 형벌을 부과했고, 학문을 숭상하며 노인을 공경했다. 자격없는 자에게 관직(名器)을 맡기지 않았으며, 자신과 친한 사람이라고(近昵) 실권을 주지 않았다. 아무리 가까운 인친일지라도 공로가 없으면 상을 주지 않았고, 측근의 아끼는 신하라도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내렸다. 환관과 급사의 수가 10여 명에 불과하고 내시(內侍)는 반드시 공로와 재능이 있는 자를 가려 임명했는데 이 또한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쓸모없는 관리가 줄어 일이 간편해졌으며, 비용이 절약되어 나라가 부유해졌다. 나라의 창고에는 해마다 곡식이 계속 쌓이고 모든 백성들이 풍요를 누리니, 당시 사람들이 ''''태평성대\''''라고 찬양했다. >'''[[송나라]]에서는 매번 왕을 칭상하는 조서를 보내 왔으며, [[요나라]]에서는 해마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을 보내곤 했다. 심지어 동쪽의 [[일본|왜국]]에서도 바다를 건너 보배를 바쳤으며, 북쪽의 오랑캐들도 자발적으로 투항해 와 우리 국적을 얻고 거주지까지 받았다(受廛).''' 그러므로 임완(林完)은 문종을 두고, ‘우리나라의 어질고 성스러운 임금’이라고 칭송했다. 다만 [[개성시|개경]] 부근의 한 개 현(縣)의 치소를 옮기면서 [[절(불교)|절]]을 세운 일은 비판의 소지가 있다. 그 웅장한 건물은 궁궐보다 사치스럽고 높다란 성벽은 개경의 성벽과 같았으며 황금으로 탑을 쌓는 등, 모든 것들을 그에 준하게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나라를 망친 [[무제(양)|양무제]](蕭梁)의 어리석음에 견줄만한데, 문종은 후대에 자신의 덕행을 찬미하는 자가 이 점을 탄식하게 될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의 논평'''. >현종(顯宗)이 중흥의 공을 이룬 덕분에 [[종묘]]와 사직이 안정을 되찾았으며 '''문종(文宗)이 태평성대의 통치를 펼치니 백성과 만물이 모두 화락하게 되었습니다.''' >---- >'''[[김종서(조선)|김종서]]. 《[[고려사]]》 전문 中'''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은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 ---- >《[[고려사절요]]》 [[문종(조선)|문종]] 12년 >"문종 시절에는 백성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다." 라고 평했다. > ---- >[[세종(조선)|세종]]의 명으로 편찬된 《[[고려사]]》 전문 中 문종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는 [[나라]]가 부유해지고, [[불교]]와 [[유학]]의 조화가 이루어졌으며 [[외교]]적으로도 [[송나라|북송]], [[요나라]], [[일본]]과의 사이에서 중심추를 잘 잡아 외침이 없었으니, 이 시기 [[문화]]적으로 다양한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문종의 4남인 '''대각국사''' [[의천]]은 [[북송]]에 밀항 유학 뒤 [[천태종]]을 도입해 고려 불교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고, '''해동공자''' [[최충]]도 이 시기의 인물로 유학 또한 흥성하게 된다. 보통 [[명군]]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상당수는 재위 기간이 길수록 후반부에 혼란이 일기 쉬운데 문종은 재위 후반부로 접어들어도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다 나라에 일이 생긴 것은 [[여진족]] 침입을 막아냈다 정도 뿐이었다. 재위 기간도 37년으로 고려에서는 제23대 [[고종(고려)|고종]](46년) 다음으로 긴 재위 기간을 자랑한다. 이처럼 [[한국사]]에 손꼽힐만한 [[태평성대]]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 사이에서 문종의 일반적인 [[인지도]]는 업적에 비해 낮은 축에 속한다. [[사극]]에라도 나오면 대중적 인지도가 올라가지만 이 시기는 [[작가]]들도 잘 몰라서인지, 아니면 알지만 소재가 없어서인지, 어쨌는지 잘 나오지를 않는다. 물론 사극에서 [[고려]]시대 자체가 [[조선]]시대에 밀려 입지가 좁다.[* 까놓고 말하자면, 명군이고 성군인 것이 작품의 재미를 보장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려면 대규모 전쟁 신이 계속해서 나오든지 정치적으로 이리저리 뒤집히고 하든지 해야 하는데, 둘 다 해당이 없기 때문. 당장 조선시대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는 인물인 세종만 해도 그 위상에 비하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역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많다고 하기 어려운 편이다. 많이 나오는 건 그 아버지인 태종이나 둘째 아들인 세조 쪽인데 둘 다 정치적 격변이 있었던 경우에 해당하며,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무난하고 순탄했던 세종조에 이런저런 무리수를 둔 끝에 고증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대왕 세종]] 같은 문제작도 있다.] [[교과서]]에서도 고려의 태평성대 기간은 [[거란]]의 침공([[여요전쟁]])과 [[윤관]]의 [[여진정벌]]([[동북9성]]) 사이에서 생략되며, 바로 [[문벌귀족]]의 폐해를 설명하고, [[무신정권]]으로 넘어가는 등 은근히 소외받는 시기다. 교과서에서도 등장이 없으니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이나 [[공무원]] 시험 등 일반인들이 주로 치는 [[시험]]에도 등장이 없다. 그래서 시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제6대 [[성종(고려)|성종]] 대를 [[전성기]]로 아는 사람도 은근히 있는 편이다. 그래도 언급이 전무한 건 아니다. [[전시과#s-3|경정전시과]]가 언급이 되기는 하지만 시험에는 제5대 [[경종(고려)|경종]]의 [[전시과#s-3|시정전시과]]가 주로 출제되는 편이며, 문종의 이야기가 아닌 최충의 [[9재학당]] 설립 당시의 임금 정도로만 언급되는 편이다.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군주라는 언급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