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자명왕 (문단 편집) == 평가 == 무색무취한 태왕, [[전성기]]를 무난히 유지한 태왕으로 보이지만 적은 [[사료(역사)|사료]]로도 상당히 많은''' 문제를 내재한 군주'''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사실 후대인 안장왕이 깔끔하게 뒤처리를 하며 전성기를 유지시켰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전성기가 백제처럼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단 2세대로 끝나버렸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선대 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박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외정에서 북방, 남방을 가리지 않고 실책을 거듭했기 때문. 북방의 기마 [[민족]]들인 [[물길]], [[거란]]과 남방의 농경 [[국가]]인 웅진[[백제]]의 [[동성왕]], [[무령왕]]과 같은 중흥 [[군주]]들에게 힘에서 밀리기 시작했으며 특히 백제와 1:1에서 밀리기 시작한 게 문자명왕의 시대였다. 덕분에 장수왕 시기에 차지한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빼앗긴 것으로 추측되는 사료들도 나오며 장수왕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던 남진 [[정책]]이 중단된 것 또한 문자명왕의 시기였다.[* [[고구려]]에게는 다행히도 다음 대에 안장왕이 다시 [[국력]]을 회복해 백제와 [[전쟁]]에서 한강 유역을 되찾는 등 영토를 회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연히 남방에 대한 공세적 기조도 안장왕 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또한 지지부진한 외정의 결과 주변의 장악력도 장수왕 시기에 비해 떨어졌고 고구려의 국력이 이전과 같지 않음을 보여주고 말았다. '''이 이후 안원왕 말기부터 평원왕 초반까지 고구려는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