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자명왕 (문단 편집) === 최대 영토로 확장 === 문자명왕 대에 [[북부여]]를 흡수하면서 고구려가 최대 영토를 일구었다고 보는 시각이 학계에서도 제기되지만 반론도 있어 확실하지는 않다. 영토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물길]]의 침략으로 쫓겨난 부여의 유민을 받아들인 것이며 부여 영역의 회수는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이후 《당서》에 고구려 국경이 기존 2,000리에서 동서 3,100리로 확장되어 [[요서]]의 [[차오양|조양]](朝陽, 영주)에 접했다는 기록이나 《통전》, 《태평환우기》에 [[수나라]] 시절 고구려 영토가 동서 6,000리였다는 기록 등이 전해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전성기 이후에도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했다고 보기도 한다.[* [[북한]]의 경우에는 이 기록을 역사 부도에 적극 반영하는 편이라 [[남한]]의 고구려 강역 표시랑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학계에서는 한국사로 취급하는 왕조 중 역대 강역이 가장 컸던 나라로 척박한 [[연해주]] 땅이 많기는 했지만 [[발해]]를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국내에서는 경복대학교 교수, 윤용구 인천도시공사 문화재부장, 윤병모 작가, 정원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 등이 이쪽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고구려 동서 6,000리라는 표현을 [[거란]]과 [[말갈]] 방면, 대릉하 하류, 의무려산 이동~연해주 방면으로 뻗은 것으로 보는 편이다. 이정빈은 좀 더 구체적으로 1차 [[고구려-수 전쟁]] 이후 수나라가 점차 동진해오면서 요하 하류까지 세력을 넓힌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가 동서 3,100리로 요하를 넘어 영주에 이르렀다는 《[[신당서]]》·《[[구당서]]》의 기록도 윤용구와 윤병모는 동서 6,000리와 뭉퉁그려서 동북쪽과 서북쪽에 있던 거란과 말갈 방면으로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본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설치한 9주 중에 월희주가 있었는데 발해의 15부 중 회원부, 안원부에 있던 월희말갈로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