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신 (문단 편집) === 과거 === 고대 사회의 문신은 일종의 증표로 기능했다. 문신이 증표로 통하게 된 것은 주술적인 뜻을 가졌기 때문이다. 원시문명에서는 이 주술적인 의미를 연장시켜 성인식을 통과한 이에게 문신을 새겨 부족의 구성원이라는 의미를 부여했고, [[마오리족]]처럼 신분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세계각국에는 다양한 문신이 있다. [[폴리네시아인]]들은 몸에 자신의 개인사나 소속 부족의 역사를 문신으로 새겼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장편 애니인 [[모아나]]에서는 주인공 [[모아나(디즈니 캐릭터)|모아나]]가 동료인 [[마우이(모아나)|마우이]]의 몸에 새겨진 문신을 보다가, 한 [[여성]]이 아기를 던져버리는 그림이 새겨진 것을 보고, 그가 부모에게서 버림받았음을 알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폴리네시아인]]들의 풍습을 상세히 고증한 부분이다.]. [[선사 시대]] [[유럽]]에서는 주술의 힘을 빌어 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환부에 문신을 하기도 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신의 증거는 기원전 3300년경에 사망한 [[청동기 시대]] [[유럽]]의 남성 [[미라]]인 [[외치]]인데, [[고고학자]]들이 조사한 결과로는 [[관절염]]을 앓고 있던 무릎 부위를 포함해 몸 전체에 수많은 문신이 있었다. [[유교]]가 등장한 이후로, [[중국]] 문화권에서 문신은 주로 [[야만인]]의 풍습으로 여겨졌다. [[한족]]의 전통에는 문신이 없었고 [[오(춘추시대)|오나라]], [[월나라]] 같은 변방의 풍습이었기 때문. [[장자]] 내편에 보면 어떤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 사람이 [[월나라]] 사람은 의관을 하지 않고 맨몸에 맨머리로 산다는 말을 듣고 거기 가서 의관 장사를 하려고 가봤더니, 월나라 사람은 모두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 문신을 하고 다녀서 의관을 쓸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장자의 이 예화는 [[문화상대주의]], 또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편협한 관점과 행동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된다.(출처: 왕멍 저 <나는 장자다>)] 그러나 [[중화권|중국 문화권]]에서도 주로 [[무뢰한]], [[군인]], [[무인]]층이 증표나 개성의 의미로 하는 문신은 있었다. 예를 들면, [[수호전]]의 구문룡 [[사진(수호전)|사진]](말 그대로 9마리의 [[용]] 문신), 화화상 [[노지심]](온 몸에 꽃 문신) 등이 문신으로 유명하다. [[노준의]]는 자신의 하인 [[연청]]의 피부가 흰 것을 보고 문신으로 장식을 해주기도 했다. 특히 [[악비]]는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이란 문신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형벌로서 문신을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중국]]은 문신을 죄인과 노예에게 새기는 낙인으로 사용했다. 노예에게는 문신이 주인이 있다는 증표로 통했다. 중죄인에게는 묵형(墨刑)[* 글씨를 먹으로 문신하는 것.], 자자형(刺字形)[* 글씨를 상처로 새겨 흉터를 남기는 것.]이라 하여 죄상을 얼굴 혹은 팔에 새김으로써 범죄경력이 있는 자임을 알리고 수치심을 주려는 형벌로 사용했는데, 한국에서는 이런 형벌을 가하는 것을 '경을 친다.'고 표현한다. 현대의 '실명 공개'와 '전자 발찌'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보통은 경만 치지 않고 귀양 등 다른 형벌과 병행했다.[* [[초한지]]의 [[영포|경포]]가 대표적인 사례. 애시당초 경포의 경은 [[경을 치다|묵형을 뜻하는 경(黥)을 가리킨다]]. 본명은 영포. 또, [[수호전]]에서도 [[양산박]] 108호걸들이 뻔질나게 받는 형벌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양지(수호전)|양지]], [[임충]], [[무송]] 등 귀양살이를 하는 상당수의 인물이 묵형을 받았고, 신의 [[안도전]]이 이 문신을 감쪽같이 지우는 것으로 유명했다. 중국 [[북송]]의 명장이었던 [[적청]]도 문신이 있었다. 북송에서는 탈영을 막기 위해 병졸 얼굴에 문신을 새겼는데 적청도 하급 병졸에서 군생활을 시작하다 보니 문신을 새겼고, 나중에 [[장군]]으로 진급하고 전공을 세우자 [[황제]] [[송인종|인종]]이 약으로 문신을 지우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지만 거절했다. 오히려 이 문신 때문에 하급 병졸도 적청을 믿고 잘 따라온다는 것이 이유였다.] [[경을 치다|경(黥)을 칠 놈]]이라는 욕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다만, 죄상을 몸에 새긴 채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라 후대로 갈수록 빈도가 줄어들었다. [[서울대학교]] 국문과 조범현 교수는 [[정사 삼국지|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韓) 편을 들어 문신은 고대 [[한민족]]의 전통적인 문화행위였다고 설명했다. [[마한]] 항목으로. 또한 최근 목간 연구의 성과로 마한 일부지역에서 문신문화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중국의 유교 문화가 들어오면서 문신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생겨났고, [[고려]]부터 [[조선]] 초반까지 형벌로서 묵형을 행하였으며 [[경국대전]] 이후 국내 실정에 맞춘 법이 확립되면서 사라졌다.[* [[이두호]]가 만화로 그린 [[객주]]에서는 조선 말임에도 묵형을 받은 인물이 나오는 오류를 보여주기도 했다. 죄인의 얼굴에 글씨를 새겨 넣는 자자형이 폐지된 것은 [[영조]] 때의 일이다.] [[조선]]에서도 문신을 행했다. 대표적인 예로 [[어우동]]이 자신과 동침한 남자들의 이름을 몸에 새긴 것이다. 전쟁에 나가기 전 몸에 제 이름 등의 인적사항을 새기는 부병자자(赴兵刺字)라는 풍습도 있었다. 이외에도 장수가 사기 증진 목적으로 새기기도 했다. [[연인]]이나 친구, 의형제끼리 실에 먹물을 묻혀 바늘에 꿰어 살을 통과시키는 '점상문신'도 있었는데, 이는 1960년대까지도 유행했다. 어느 [[효자]]는 부모를 여읜 것을 슬퍼하다 하늘에 맹세하는 글 132자를 무릎에 문신했다고 한다. [[http://www.etoday.co.kr/issue/newsview.php?idxno=1498331|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