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순득 (문단 편집) === 그 후 === 문순득은 글을 배우지 못한 장사치였으나[* 전혀 모르지는 않아서 [[청나라]]에서 조사하였을 때 본인이 써가지고 있던 문서가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어쨌든 자기 이름 석 자는 쓸 수 있지만 책을 쓸 정도까진 아니었던 듯 하다.] 총명하고 입담이 좋았다.[* 이강회는 "비록 문자에는 능한 것은 아니나 사람됨이 총명함과 재능이 있다"는 평을 하였다.] 그의 표류 이야기는 곧 주변 사람들을 통해 퍼져 나갔다. 전세계가 [[중국]], [[일본]]이나, [[여진족]]·[[튀르크]] 족·[[거란]]족 같은 북방 [[유목제국]]들같은 [[동북아시아]] 국가들이나, [[인도]] 정도라고 생각했던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 문순득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신비롭게 느껴졌던 것 같다. 고향에 돌아온 문순득은 어느 날 다시 [[홍어]]를 거래하기 위해 [[흑산도]]에 들렀는데, 이때 흑산도에 유배 온 [[정약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풍랑을 만나 표류하며 보고 들은 바를 전해주었고, 정약전은 문순득의 체험담을 날짜별로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쓴다.[*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천초(天初)'라는 별호도 지어주었다. '(이런 경험을 한 것은) 조선 땅에서 네가 처음'이라는 뜻이다. 정약전이 문순득의 체험담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남평 문씨 족보를 보면 문순득의 자가 대초(大初)인데, 아마 이와 연관이 있는 듯하다.] 문순득의 표류기는 정약전의 동생인 [[정약용]]에게도 전해졌으며, [[필리핀 도독령]]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용함을 전해들은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조선]]의 화폐 개혁안을 제안하게 된다. 또한 정약용은 [[강진군|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제자인 이강회(李綱會)를 우이도로 보내 문순득을 만나게 하였고, 『[[운곡선설]](雲谷船說)』[* 문순득이 견문한 [[류큐국]], [[마카오]], [[중국]], [[필리핀]] 등에서 얻은 선박 제조법을 위주로 하고, 여기에 표류한 서양 선박의 제도까지 첨부하였다. 특히, 저들의 선박과 [[조선]]의 선박을 비교하여 서술함으로써 그 우열을 드러나도록 하여 조선 선박의 특징까지 부각되어 보인다. 중간 중간 친구인 이청의 견문과 견해를 소개하기도 하면서 조선 선박의 취약성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선박 제조법에 관해 조선시대에 쓰인 전문적인 저술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바 없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저술이다.]을 집필하게 한다. 알게 모르게 조선 후기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표해시말]] 집필을 계기로 문순득은 [[정약전]]과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문순득은 정약전을 가족처럼 모셨고[* 정약전이 19살 연상으로, 거의 아버지뻘이었다.],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사망했을 때에는 극진하게 장례도 치러주었다. [[정약용]]도 형 정약전을 통해 문순득의 친절을 알고 있었기에 문순득이 아들을 낳았을 때 아들 이름도 지어주고, 정약전이 사망한 후 문순득이 장례를 잘 치르어 준 것을 감사하는 편지도 보냈다. 참고로 '표해시말'의 말미엔 112개의 [[한국어]] 단어를 [[한자]]로 적은 뒤 [[류큐어]](81개)와 [[일로카노어]](54개)로 싣고 있어서 언어학적으로 가치가 높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미 100여 년 전에 이 책이 완역되었으며, 한국에서도 2005년에 완역본을 발간하였다. 그 사이 1801년([[순조]] 1년) 8월[* 양력 9월. 이후 3개월 뒤에 문순득이 물고기를 사기 위해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 끝에 유구국에 표착하게 된다.]에 5명의 외국인이 [[제주도]]에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708010_002|표착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북경]]으로 보내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지만 [[청나라]]에서도 이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른다고 하여 [[반송|되돌려 보냈고]], 그 사이에 1명이 병이 들어 죽었다. 그러다 조선에 표착한 [[류큐 왕국|유구국]] 사람 궁평(宮平)이 이들과 대화한 끝에 루손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 궁평이 1802년에 중국인 32명과 '''조선인 6명이 [[류큐 왕국|자기 나라]]로 표류해 온 일'''이나 '''이들이 중국 복건성으로 가는 배를 탔다가 또 풍랑을 만나 루손 섬으로 표류한 일'''을 언급하는데, 날짜와 표류 장소를 따져 볼 때 이 문순득 일행일 확률이 높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 표류인들을 궁평과 같이 보내려고 했는데, 곧바로 그가 고국으로 되돌아가게 되어 그대로 무산되었다. 그렇게 이 표류인들은 9년이나 제주도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또 1명이 죽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문순득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이들에게 데려다줬는데, 문순득이 [[일로카노어]]로 말을 걸자, 그들이 "드디어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다"며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고향인 [[루손섬|루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순조실록]]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비슷한 일화로 [[얀 야너스 벨테브레]]가 [[헨드릭 하멜]] 일행을 처음으로 만난 이후, 숙소로 돌아와서 소매가 다 젖도록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여송국(呂宋國)의 표류인(漂流人)을 [[선양시|성경(盛京)]]에 이자(移咨)하여 본국(本國)으로 송환(送還)시키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신유년(1801년) 가을 이국인(異國人) 5명이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도착하였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오랑캐]]들의 말이어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나라 이름을 쓰게 하였더니 단지 [[마카오|막가외(莫可外)]]라고만 하여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자관(移咨官)을 딸려서 성경으로 들여보냈었는데, 임술년(1802년) 여름 성경의 예부(禮部)로부터도 또한 어느 나라인지 분명히 알 수 없다는 내용의 회자(回咨)와 함께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그 중 1명은 도중에서 병이 들어 죽었다. 그리하여 우선 해목(該牧)에 머무르게 한 다음 공해(公廨)를 지급하고 양찬(粮饌)을 계속 대어주면서 풍토를 익히고 언어를 통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가운데 1명이 또 죽어서 단지 3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 사람 '''문순득(文順得)'''이 표류되어 여송국에 들어갔었는데, 그 나라 사람의 형모(形貌)와 의관(衣冠)을 보고 그들의 방언(方言)을 또한 기록하여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그런데 표류되어 머무는 사람들의 용모와 복장이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여송국의 방언으로 문답(問答)하니 절절이 딱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미친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서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는 정상이 매우 딱하고 측은하였다. 그들이 표류되어 온 지 9년 만에야 비로소 여송국 사람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른바 막가외라는 것 또한 그 나라의 관음(官音)이었다. 전라 감사 이면응(李冕膺)과 제주 목사 이현택(李顯宅)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 >乙卯/命呂宋國漂人, 移咨盛京, 送還本國。 先是, 辛酉秋, 異國人五名, 漂到濟州, 而鴂舌聱牙, 莫辨魚魯。 寫其國名, 只稱莫可外, 未知爲何國人。 移咨入送于盛京, 壬戌夏, 自盛京禮部, 亦未能確指何國, 回咨還送。 而一名在塗病故矣。 命姑留該牧, 給公廨, 繼糧饌, 使之習風土, 通言語, 其中一人又故, 只餘三名。 至是羅州 黑山島人文順得, 漂入呂宋國, 見該國人形貌衣冠, 其方言, 亦有所錄來者。 而漂留人容服, 大略相似, 試以呂宋國方言問答, 則節節脗合。 而如狂如痴, 或泣或叫之狀, 甚可矜惻。 漂留已爲九年, 而始知爲呂宋國人, 所謂莫可外, 亦該國之官音也。 全羅監司李冕膺、濟州牧使李顯宅, 具由以聞, 有是命。 >----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 6월 26일 을묘 1번째 기사 '''한국사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인 셈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1835년([[헌종(조선)|헌종]] 원년) 문순득의 공을 치하하여 가선대부 종2품 [[공명첩]]을 하사했다고 한다.[* 현재도 당시 하사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공명첩이 6대손 문채옥의 집에 남아 있다.[[http://hnkostma.org/emuseum/service/data/dataDetail_evo.jsp?data_group=3702|#]]] 참고로 조선시대 관직체계에서 정1품부터 정3품까지는 당상관이라고 해서 고위직으로 분류되었다. 즉, 비록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고위직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벼슬을 얻었다. 그야말로 '''인생살이 [[새옹지마]]'''. 이후로도 천수를 누리다가 1847년 4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여러 일화를 볼 때 문순득은 비범한 기억력과 외국어 습득 재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문자를 익힐 기회가 적고 외국과의 교류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조선]] 시대의 평민이 그랬다는 것이 더 놀라운 점이다. [[얀 야너스 벨테브레|박연]]의 사례나 [[헨드릭 하멜|하멜]]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지만, 보통 표류해서 다른 나라에 뚝 떨어진 외국인들은 그 나라의 말을 익히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며, 이는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술한 일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제주도]]에 표류한 [[필리핀인]]들은 9년 동안 자신들의 국적도 해명 못하는 상태였지만 문순득은 고작 3년 만에 [[류큐어]]와 [[일로카노어]]를 능숙하게 배워서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에도 일로카노어 통역을 할 정도로 숙달된 실력이었다는 걸 보면 가히 외국어 마스터 달인으로 불려도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또 언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표류국에서 언어와 생계수단을 빠르게 배워 적응하며 살았던 것을 보면, 굉장히 강한 생활력을 가지고 매우 강한 강철 멘탈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연고도 없는 외지에서 생판 모르는 외국인에게 말을 걸고 언어를 배웠을테니 대단히 외향적이고 친화적이며 붙임성이 좋았을 법한 성격도 짐작할 수 있다.[* [[류큐 왕국]]에 1차 표류를 했을 당시, 류큐와 [[조선]]에는 표류민을 본국으로 송환해주는 상호 조약이 이미 있었다. 다만 당시 류큐는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중국]]을 거쳐서 송환해주었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류큐어]]를 그렇게 절박하게 익히지 않았어도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뜻이다(출처: 역사 스페셜). 거기다 현지에 [[한국어|조선어]] 통역사까지 있었다고 하니, 간절해서 류큐어를 익혔다기보단 문순득 본인이 소통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문순득은 19세기 초에 [[필리핀]]과 [[마카오]]를 최초로 여행한 [[한국인|조선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표류는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었지만,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필리핀]]과 [[서양]]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었다. 특히, [[정약용]]과 [[정약전]], [[이강회]] 등 실학자들의 세계관 확대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