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소황후 (문단 편집) ====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설들 ==== 220년 정월, 조비가 왕위에 즉위했다. 그 해 6월, 조비는 남방 정벌에 나섰으나 문소황후는 따라가지 않고 업성에 남았다. 이것이 문소황후가 죽기 전의 마지막 기록이고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는데 관련 기록들을 모두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1. 220년 10월, 조비는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산양공이 된 헌제는 두 딸을 조비에게 시집보내 조비의 빈비가 되게 했으며, [[곽여왕]] 등도 모두 총애를 받았다. 문소황후는 갈수록 실의에 빠져 원망하는 말을 하게 되었다. 조비는 대노하여 221년 6월에 사자를 보내 그녀에게 죽도록 하였다. 죽은 후에는 업에 매장하였다. >---- >정사 문소견황후전 >2. 명제(조예)가 즉위하고 나서 문소황후가 이미 죽어 세상에 없음을 추모하고 슬퍼하자 태후(곽여왕)는 우려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문소황후가 죽을 때, 조예를 이부인에게 맡겼다. 곽여왕이 죽자, 이부인은 처음으로 문소황후가 참소에 의한 화를 만났고, 시신을 관에 넣는 의식인 대렴을 받지 못했으며,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었음을 설명하니 조예는 슬퍼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곽여왕의 빈장을 모두 문소황후의 고사와 똑같이 하라고 명령했다. >---- >위략 >3.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곽여왕(곽귀빈)을 총애하니 문소황후(견부인)는 업에 남아있어 알현할 수 없게 되고 실의에 빠져서 원망하는 말을 하게 되었는데 곽여왕이 이를 가지고 참소하자 황제가 크게 노하였다. 6월 28일 사자를 보내 문소황후에게 죽음을 내렸다. >---- >자치통감 >4. 유사(담당관리)가 장추궁(황후)을 세우는 것을 아뢰니, 문제(조비)가 새서로 황후(문소황후)를 맞이하려 하여, 이르게 하나, 문소황후가 상표하길 “첩이 듣기론 선대의 흥함에서, 국가에 제사를 오래도록 지낼 수 있었던 까닭은, 복을 후사에 물려줬기 때문이라, 후비로 인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사람을 살피고 가려서, 내교를 일으켰습니다. 가령 즉위 초에는, 참으로 마땅히 어질고 정숙한 이가 오르게 하여, 육궁을 다스려야 합니다. 첩이 어리석고 고루함을 스스로 반성하니, 자성의 일을 감내하지 못하고, 병까지 앓았기에, 감히 변변치 못한 뜻을 지키는 바입니다.” 새서가 3번 이르나 문소황후는 3번 사양했고, 글도 더욱 간절했다. 당시 한더위라, 조비는 추량을 기다렸다가 다시 문소황후를 영접하길 원했다. 때마침 문소황후가 병환으로 위독하더니, 여름 6월 정묘일에, 업에서 죽었다. 조비가 애통해하며 탄식했고, 황후의 새수를 책증하였다. >---- >위서 첫 번째 기록인 정사의 내용은 조비가 문소황후를 버려두고 다른 첩들을 총애하였고 이를 문소황후가 원망하자 사사했다는 것이다. 즉 정사의 기록을 따를 경우 문소황후의 죽음은 조비가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고 이 과정에 개입한 다른 인물은 없다. 하지만 위서와 자치통감의 기록을 보면 문소황후는 업에서 죽었고 조비는 이 때 낙양에 있었다. 따라서 문소황후가 조비를 원망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그것을 알려주지 않으면 조비는 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문소황후의 죽음은 정사의 내용과 달리 조비가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개입했지만 정사는 그것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문소황후를 모함했는지가 문제가 되는데 두번째 기록인 위략에 따르면 곽여왕은 문소황후를 참소(거짓으로 남을 헐뜯는 말)하였다. 따라서 문소황후가 원망하는 말을 하자 곽여왕이 이것을 가지고 모함을 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는 세 번째 기록인 자치통감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편 [[삼국지집해]]의 편저자 노필은 문소황후가 죽은 이유에 대해 또 다른 가설을 들었다. 명제기에 따르면 조예는 죽을 때 36세라고 나와있고 이 기록이 맞다면 조예는 조비의 아들이 아니다. 노필은 이에 대해 [[진수(역사가)|진수]]가 조예의 나이를 왜곡하였고 그 이유는 조예가 문소황후의 첫번째 남편인 원희의 아들임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조비가 문소황후를 사사한 것과 조예를 홀대한 것을 들었다. 즉 이 가설에 따르면 조비가 문소황후를 죽인 이유는 조예가 원희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예가 원희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딱히 신빙성이 없다. 다만 조비가 문소황후를 죽인 이유가 조예의 출생과 관련이 있는 것이 맞다면, 그 이유는 조예가 자신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진수가 조예의 나이를 왜곡한 것은 조예가 조비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이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런 소문이 문소황후 생전에도 있었다면 그 때문에 문소황후가 희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예]] 문서의 원희의 자식? 부분을 참조.] 네 번째 기록인 [[왕침]]의 위서는 위나라 용비어천가 성향이 있는데, 위서에는 문소황후의 엄친딸스러운 일화가 한결같이 소개되고 있고, 마지막에도 위와 같이 문소황후가 병으로 죽자 조비가 애통해하며 탄식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사 또한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고 있는 책이기 때문에 조비가 자신의 부인을 죽이지 않았음에도 죽였다고 거짓말을 칠 리는 없다. 따라서 조비가 문소황후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궈모뤄|곽말약]] 등은 조식이 문소황후를 연모하여 지었다는 [[낙신부]]와 관련된 설화를 적극 채용하여 조식이 문소황후를 연모한 것이 문소황후가 죽은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왕침의 기록에 대해 주석으로 이를 인용한 [[배송지]]는 왕침이 위나라 왕조를 보기 좋게 꾸미려고 구라를 친게 저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까며[* 진수 역시 문소황후의 죽음에 대해 숨기고 쓰지 않은 것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배송지의 의견에 따르면 그것은 춘추의 의에 합당한 서술이었다. 그런데 왕침은 조비가 문소황후를 죽이지 않았다고 완전히 사실관계를 왜곡해버렸기 때문에 진수와 비교하며 왕침을 깐 것이다.] 해당 기사 이외에도 무선황후와 문소황후를 필두로 위나라 후비들의 선행으로 적힌 것들이 모두 진실을 말한다고 보긴 어렵다고 평했다. 또 진수가 이러한 것들을 적지 않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했다. 다만 왕침이 죽음같이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 구라를 쳤다고 해서 그가 적은 다른 내용까지 구라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리고 왕침이 구라를 쳤기 때문에 그가 쓴 다른 내용도 못 믿겠다면 위서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위서 자체는 문제삼지 않고 하필 그 중에서 후비들의 선행만 못 믿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논리이다. 왕침은 구라쟁이인데 남자에 대해선 구라를 치지 않고 여자에 대해서만 구라를 쳤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또 진수가 적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도 억지다. 아래 기타 내용에서 나오겠지만 진수는 문소황후의 작위를 낮추는 조서도 적지 않았고 [[조모(삼국지)|조모]]의 죽음같이 민감한 부분도 자세한 정황은 숨겼다. 즉 진수가 어떤 것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것이 거짓이라 믿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진실이라 믿었음에도 고의로 기록하지 않은 것도 많다는 것이다. 주선전에 따르면 조비는 푸른 기운이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이어지는 꿈을 꾸고 [[주선(삼국지)|주선]]에게 해몽을 부탁한다. 주선은 이를 듣고 대답했다. "천하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가 원통하게 죽을 것입니다." 이 때가 조비가 문소황후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을 때로 이 말을 듣고 조비는 후회하며 사자를 보내 말리게 했지만 이미 그녀는 자결한 뒤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