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소황후 (문단 편집) === 사후 === 자치통감과 한진춘추에 따르면 조비는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헌제의 두 딸과 [[문덕황후 곽씨|곽여왕]] 등을 빈비로 들여 총애하였는데 업에 남아있던 문소황후는 이로 인해 갈수록 실의에 빠져 원망하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곽여왕이 이를 조비에게 참소하자 조비는 대노하여 221년 6월에 사자를 보내 그녀에게 죽도록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문소황후가 주살된 근본 원인은 [[문덕황후 곽씨|곽여왕]]이 총애를 받아서에 있다고 여겨진다. 곽여왕의 참소로 인해 죽은 문소황후는 시신을 관에 넣는 의식인 대렴도 받을 수 없었으며 초빈할 때는 저승에서도 알아보지 못하라는 의미로 머리를 풀어헤쳐 얼굴을 덮고 쌀겨로 입을 막게 했다. 이후 조비는 마침내 곽여왕을 황후로 세우고 조예를 기르게 했다. 감견기(感甄記)에 따르면 조비가 조식을 조정으로 불렀는데 문소황후는 이미 곽여왕의 참소로 죽은 뒤였다. 평소 문소황후를 사모했던 조식의 생각을 안 조비는 문소황후가 쓰던 비단 베개를 조식에게 주었다. 낙수(洛水) 근처에서 조식이 베개를 베고 잠들었는데 꿈에 문소황후가 나와 조식에 대해 사모의 뜻을 전했다. 잠에서 깬 조식은 희비의 생각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감견부(感甄賦)를 지었다. 이후 조예가 이 시를 보고 어머니의 명예를 위해서 [[낙신부]]라고 개명했다. 하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위략에 따르면 조비는 처음에는 조예를 싫어해서 다른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위말전에 의하면 어느 날 조비가 조예와 함께 사냥을 나가게 되었는데, 어미 사슴이 새끼 사슴과 함께 튀어나오자 조비가 어미 사슴을 쏜 후 조예에게 새끼를 마저 쏘라고 했다. 이에 조예는 자신과 어머니의 사정에 비유하여 "폐하께서는 어미를 쏘셨습니다. 어찌 차마 그 자식까지 쏠 수 있겠습니까." 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인 조비는 활과 화살을 내던지고 조예를 기특하게 여겨 태자로 세우기로 결심했다. 문소황후의 아들 [[조예]]가 황제로 즉위하자 어머니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그 영지로 세상을 계몽했다는 뜻으로 문소황후라는 [[시호]]를 올렸다. 227년 4월, 처음으로 선조의 영묘를 세우려고 땅을 파다가 옥새를 얻었는데, 인문(印文)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천자는 자애로운 모친을 숭앙하고 그리워한다.’ 조예는 이 글씨를 보고 얼굴을 고치며 태뢰의 제의로써 종묘에 제사지냈다. 또 조예는 꿈 속에서 문소황후를 본 후에 외가들의 친하고 소원하고 높고 낮음에 따라 차이와 등급을 두었으며, 각기 차별을 두어 임용했고 막대한 하사품을 주었으며 견상을 호분중랑장에 임명했다. 이후 이들의 가계는 대대로 이어져서 후의 팔왕의 난 즈음에도 난을 피해서 혈맥을 유지했다. 이 달, 문소황후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조예는 시복(緦服)을 만들어서 외할머니의 상례(喪禮)에 직접 참여했고, 모든 관료들도 배석했다. 230년 11월 문소황후의 옛날 능은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작게 건축되었으므로, 견상을 보내 태위를 겸임하여 부절을 갖고 업성에 가서 토지신에게 보고하도록 했으며 12월에 문소황후를 조양릉(朝陽陵)에 다시 묻었다. 견상은 귀환하여 산기상시로 승진하였다. 견상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견창으로 후사를 잇게 했다. 위략에 따르면 조예가 문소황후가 이미 죽어 세상에 없음을 슬퍼하자 곽여왕은 우려하다 갑자기 죽었다. 이부인은 처음으로 조예에게 곽여왕이 문소황후를 참소했으며 죽을 때는 대렴도 받지 못하고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었다고 말했다. 이를 들은 조예는 슬퍼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곽여왕의 장례식을 문소황후의 장례식과 똑같이 치르도록 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황제 조예가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는, 속으로 항상 원한을 품고, 자주 울며 문소황후가 죽을 때의 상황을 새어머니인 곽여왕에게 물었다. 곽여왕이 말하길 "선제께서 친히 죽이신 건데, 어찌하여 나에게 책문하는 것이냐? 또한 너는 사람의 자식이 되어, 죽은 부친을 원수로 삼고 추궁하며, 전 모친을 위해 그 뒤의 모친을 능멸하고 죽일 수 있느냐?" 조예는 분노하여 그녀를 핍박하여 죽이고는, 칙서로 곽여왕의 초빈을 문소황후가 죽을 때 받은 초빈과 똑같이 치르게 하였다. 237년 여름에 담당관리가 칠묘(七廟)의 제도를 의논하여 정했다. 겨울에 또 상주를 올려 문소황후의 영묘를 수도에 세워 대대로 공물을 바쳐 제사지내고, 음악을 연주하고 시조의 묘와 똑같이 예우하여 훼손되지 않는 법전으로 영원히 빛나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래서 조예는 칠묘 건립에 관한 상주문을 모두 금책에 새겨 금속 상자에 보관하도록 했다. [* 영묘는 시대가 변하고 관계가 멀어지면 헐리는 것이 상례이다. 단지 특별한 인물은 왕조의 지속적인 보존이 된다. 예를 들면, 주나라의 칠묘에는 후직(后稷)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의 묘가 헐리지 않았고, 현존하는 왕의 아버지로부터 4대 묘를 세우고, 왕이 바뀌면 먼 선조의 묘를 헐고, 전왕(前王)의 묘를 세운다. 주나라에서는 이 칠묘 이외에 특별히 강원(姜嫄)의 묘가 세워졌다. 따라서 주나라에서는 후직, 문왕, 무왕, 강원의 묘가 영원히 헐리지 않는 묘이다. 위나라에서는 시조인 조조, 조비, 조예와 문소황후의 영묘가 영원히 헐리지 않는 묘가 된 것이다. 강원은 후직의 어머니이므로 위나라에서는 조조의 어머니에 해당하지만, 위나라는 문소황후의 묘를 특별히 세웠다.] 조예는 외가(外家)의 일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경초 말, 견창은 아직 어렸지만, 사성교위로 삼고 산기상시의 자리를 주었으며, 또한 대저택을 특별히 지어주고, 수레를 타고 직접 찾았다. 또 그 집의 뒤뜰에 견상의 어머니를 위해서 묘를 지었고, 그 지역을 위양리(渭陽里)라고 이름하여 견상의 어머니를 추모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