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소황후 (문단 편집) === [[조조]] 휘하에서 === 조비는 업에서 문소황후와 결혼하였다. [[세설신어]] 혹닉편에 따르면 위나라의 견황후는 지혜롭고 용모가 아름다웠는데 본래 원희의 처가 되어 매우 사랑받고 있었다. 업성을 도륙한 조조가 즉시 그녀를 데려오게 했으나 이미 아들 조비가 데려갔다는 말을 듣고 "금년에 군사를 일으킨 건 다 조비 그 녀석을 위한 것이었다."라고 탄식했다. 감견기(感甄記)에 따르면 시동생 [[조식(삼국지)|조식]]은 견일의 여식인 형수 문소황후를 사모하고 있었는데 조조의 명령에 의해 조비와 결혼하자 슬퍼서 식음을 전폐하고 [[낙신부]]라는 긴 시를 지었을 정도. 세설신어와 감견기 모두 정사가 아닌 야사이지만 삼부자 모두에게 사랑 받았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롭다. 문소황후는 조비의 총애를 받았으며 [[조예]]와 [[동향공주]]를 출산했다. 조예와 동향공주의 출생년도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조예의 경우 사망년도는 나와 있지만 동향공주는 그마저도 알 수 없다. 조예는 문소황후의 첫 남편인 원희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비가 조조의 허락 아래 원희의 부인이었던 문소황후를 빼앗아 강제로 자신의 처로 삼자 [[공융]]은 조조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왕]]은 [[주왕]]을 정벌한 후에 [[달기]]를 [[주공]]에게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조가 원소를 정벌한 후에 문소황후를 조비에게 준 것을 다른 인물들에 비유하여 조롱하는 말이었는데 세간의 비난을 두려워하던 조조는 공융이 워낙 박식했기 때문에 자기를 비웃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융이 경전을 인용해 자신을 두둔한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책을 찾아봐도 그런 고사를 찾지 못했기에 나중에 공융을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어떤 책에서 발췌했냐고 물어봤는데 공융은 "지금의 일을 살펴보니 과거에도 당연히 그랬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제서야 조조는 공융이 자신의 행동을 비꼬았다는 것을 알았다. 공융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조조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208년 8월 조조는 공융을 불효했다는 핑계로 죽이고 삼족을 멸한다. 위서에 따르면 문소황후는 조비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오히려 다른 조비의 후궁들이 총애를 받도록 응원했고 조비에게 많은 측실을 두어 후계자를 많이 낳으라고 권했다. 나중에 조비는 후궁 임씨(任氏)가 자신의 성질을 여러번 건드리자 쫓아내려고 했다. 문소황후는 자신이 총애 받는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데 임씨가 쫓겨나면 사람들은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며 울면서 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비는 임씨를 쫓아냈다. 위서에 따르면 211년 10월, 조조가 관중(關中)으로 마초와 싸우러 갔을 때 [[무선황후]] 변씨도 따라가서 맹진(孟津)에 머물렀다. 조비와 문소황후는 이때 업성에 있었다. 변씨는 병에 걸린 상태였는데 문소황후는 시어머니 변씨를 걱정하여 하루종일 울었다. 주변의 신하들이 변씨가 낫고 있다며 문소황후를 달랬지만 문소황후는 시어머니가 집에서도 항상 아팠는데 밖에서 병이 나을리가 있냐며 믿지 않았다. 나중에 병이 나았다는 변씨의 편지를 받고서야 문소황후의 마음이 풀어졌다. 212년 5월, 군대가 업성으로 되돌아 오고 문소황후는 변씨를 만나러 갔는데 시어머니 변씨의 장막이 보이자 문소황후는 이미 기뻐서 울었고 주변 사람들은 그에 감동했다. 변씨도 견씨의 효심에 감동하여 함께 울었다. 변씨는 "견씨는 진짜 효행인 신부겠지요" 하면서 그녀의 효행을 칭찬했다. 전략에 따르면 태자 조비가 여러 유생들을 불러 연회를 벌이다가 즐거워서 부인 견씨에게 나와 절을 하게 했다. 모두 엎드렸으나 [[유정(건안칠자)|유정]]만은 홀로 평소대로 쳐다봤다. 조조가 이를 듣고 유정을 불경죄로 잡아들인 뒤, 죽이려고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고 돌을 가는 일을 하게 했다. 하지만 이후 유정이 돌에 자신을 비유해 변호하자 조조는 크게 웃으며 사면시켜주었다고 한다.[* 처음에 조조가 유정을 죽이려고 한 것은 그만큼 문소황후를 약탈한 일에 대한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의미다.] 이 일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내용이 후대의 소설에서도 보인다. 청나라 때 포송령이 지은 소설 [[요재지이]]를 보면 문소황후가 뜬금없이 유정의 후손 유중감을 찾아온다. [[https://imagediet.wordpress.com/2012/02/01/중국-청나라-포송령-요재지이-견후/|링크]] 위서에 따르면 216년, 조조가 손권을 공격하러 출병하자 문소황후의 시어머니 무선황후, 남편 조비, 아들 조예, 딸 동향공주 등은 모두 조조를 따라갔지만, 문소황후는 병 때문에 업에 남았다. 다음해 217년 9월 귀환했을 때, 변씨를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들은 문소황후의 안색이 좋은 것을 보고 "2명의 아이들과 떨어져 있었는데, 전보다 더 안색이 좋은 것은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문소황후는 "제 아이들이 어머님(변씨)과 함께 가고 있는데, 나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니 문소황후의 총명함이 이와 같았다.[* 아이들과 떨어져 있었음에도 조조 집안 사람들이 모두 원정을 나가자 오히려 안색이 좋아진 것은 그만큼 조조 집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내색할 수는 없으니 시어머니를 띄워주는 대답을 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을 살펴보면 원가 휘하에서나 조조 휘하에서나 고부 간의 갈등은 거의 없었고 두 시어머니를 효심으로 봉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두번째 시어머니 무선황후의 경우 후대의 일화를 보면 상당한 인격자로 알려져 있어 자신을 약탈한 남자들인 조조 집안 남자들과 살기가 버거웠을 그녀 입장에서 의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조비가 [[조홍#s-1]]을 사적인 원한으로 죽이려고 했을 때 무선황후가 뜬금없이 새 며느리인 곽여왕을 황후에서 쫓아내겠다고 협박하는 장면은 여러한 친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