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무왕 (문단 편집) == 기타 == * 불교 신자임에도 절간에 대한 토지 지급을 일시적으로 끊거나 줄이는 정책을 하며 [[현종(고려)|고려 제8대 현종]]보다 종교 문제에 대해 성공했다고 《[[동국통감]]》에 기록했다.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불교에 대한 개혁 정책을 가장 처음 실시했다. 비록 미완이었지만 유교적 시각에서도 꽤 높은 평을 받은 군주였다. * 역대 신라의 군주들 중에서는 비교적 신라의 뿌리깊은 신분제도였던 [[골품제]]에 크게 얽메이지 않고 능력과 공적 위주의 논공행상이나 인사를 벌이는 모습도 종종 보여주었는데, 대표적으로 [[말갈]]을 상대로 무쌍을 찍었던 [[맹장]] [[소나(신라)|소나]]를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벼슬인 잡찬(신라 17관등 중 3위)에 추증한 점이나, 군공을 세워 김유신의 추천을 받은 장군 열기를 사찬 벼슬에 올려준 사례가 있다. 열기는 《삼국사기》 열전에도 이름을 올렸지만 '가문을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는 데다가 김유신의 추천을 받았을 때도 문무왕은 처음에 "사찬은 너무 지나친 상 아닌가?"라고 의문을 표시했던 기록도 있어서 상대적으로 낮은 골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열기의 사례는 문무왕이 의문을 표시하자 김유신이 "관직은 공평한 그릇이니 공을 세운 자에게 보수로 주는 것을 어찌 지나치다 하십니까?"라고 간언하자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뒷날 열기는 [[김유신]] 사후 [[김유신]]의 아들 [[김삼광]]에게 청해서 삼년산군 태수 자리를 받아내기도 한다.] * [[사극]]에서는 아버지 무열왕이나 외삼촌인 김유신에 비해 비교적 비중이 적은 편이다. 삼국 통일기의 전쟁에서 문무왕의 활약은 아버지나 외삼촌 못지 않은데, 태자 시절 백제 공격 때는 김유신과 함께 직접 백제를 공격하기도 했고 고구려 멸망이나 나당전쟁 승전은 문무왕 치세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나 삼국 통일기를 다룬 사극들이 통일전쟁의 서막을 연 무열왕과 김유신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한 세대 뒤의 문무왕은 그저 이들이 주도한 통일 사업을 마무리하는 군주 정도로 간략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마치 《[[삼국지]]》에서 [[도원결의]] ~ [[제갈량]] 사망까지만 상세하게 나오고 그 뒤는 아예 생략하거나 대충 넘어가는 것과도 비슷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그 업적이나 중요도에 비해 사극에서 크게 조명 받지 못한 역사 인물이다. 《삼국지》도 그렇듯 후반부까지 똑같은 비중으로 제대로 다루기엔 전반부터 달려온 작가의 필력과 근성 문제나 사극의 경우 전쟁씬 연출의 체력적ᆞ비용적 부담이 큰 것으로 보인다. * 다만 대중적으로는 아버지나 외삼촌에 비해 이미지가 더 좋은 편. 삼국통일이나 당으로부터 삼한을 지켜내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죽기 전 유언의 무게감이나 대왕암 전설의 신비한 이미지가 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2003년 4월, [[충무공이순신급]] 2번함(DDH-976)이 문무대왕함이란 함명으로 진수되었다. 2009년 4월, [[소말리아 해역 호송전대]](일명 청해부대)에 다른 함선들과 순환 파병되기 시작했다. 2021년 7월, 문무대왕함이 파병을 갔을 때 [[청해부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이 발생한다. * 2021년 4월, [[경주시]] 면 지역 명칭 변경의 유래가 되었다. (양북면 → [[문무대왕면]]) [[https://www.gyeongju.go.kr/news/page.do?mnu_uid=1336&parm_bod_uid=209387&step=258|#]] * 2021년 7월 21일, [[경주시]] [[감포읍]]에 짓는 [[한국원자력연구원]] 분원을 문무대왕과학연구소라고 명명한다.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1072117225588733|#]] [[감포읍]]은 [[문무대왕면]] 바로 옆에 있는 해안이다. [[원자력 발전소#s-4.5.1|소형모듈원전(SMR)]] 연구를 중점적으로 할 예정이며, 2025년 완공 예정이다. [[문재인 정부]]가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에 있던 한국원자력연구원을 경주로 이전하려는 계획이 있었다가, 반발에 부딪치자 분원을 크게 짓는 형태로 이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