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묘제례악 (문단 편집) == 역사 == [[고려]] [[예종(고려)|예종]] 11년(1116) [[북송]]에 사절로 갔다온 [[왕자지]]를 비롯한 사절단이 [[휘종(송)|휘종]]에게 받아온 《대성아악》(大成雅樂)이 문묘제례악의 직계 원조이다. 초기에는 이 아악과 그 연주 형태를 큰 개작없이 문묘 관련 제례에 사용했다. 하지만 이후 남송이 [[애산 전투]]로 몰락하고, 몽골족의 [[원나라]]가 등장해 중국뿐 아니라 한반도까지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제례도 같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이렇게 뒤죽박죽이 된 문묘제례와 제례악이 본격적으로 정비된 때는 [[조선]] 초 무렵이다. [[세종대왕]]의 명을 받은 [[박연]]이 원 시절 편찬된 《대성악보》(大成樂譜) 또는 《석전악보》(釋奠樂譜)를 비롯한 대성아악 관련 중국 문헌들을 참고하고, 일부 의식 변화에 따라 개작과 첨삭을 가해 정비했다. 이렇게 개량되고 복원된 제례와 제례악은 한동안 큰 변화없이 상용되었지만, 16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또다시 전승이 끊기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두 환란 사이에 [[광해군]]이, 호란 후에는 [[영조]]가 《[[악학궤범]]》을 비롯한 문헌을 참고해 다시 복원하도록 했는데, 이 때도 박연이 정리한 것이 그대로 전승되지 않고 일부가 축소되거나 개작된 형태로 변형되어 정립되었다. 1912년 [[청나라]]의 멸망 이후 중국에서 왕조가 사라지고, 이어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체제를 거치면서 '''중국의 문묘 의식은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그나마 [[문화대혁명]] 후에야 문묘제례와 제례악을 학술적으로 복원하고자 노력했는데, '''이때 많이 참고한 것이 한국에 남은 문묘제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