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공(주) (문단 편집) == 후대의 평가 == '''[[공자]]가 매우 존경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논어]]에서도 그의 꿈을 꾼 지 오래되었다고 공자가 한탄하는 일화가 나온다.[* 《[[여씨춘추]]》에는 한술 더 떠서, 공자가 꿈에 주공 단을 만나 가르침을 받곤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를 전한다.] [[유교]]의 창시자를 공자가 아니라 주 문공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 이유는 [[조카]]를 왕으로 앉히고서도 자기가 찬탈하지 않은 인의지사라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삼감의 난이 [[상나라|상 왕조]] 부활이란 명분과 문공의 [[섭정]]을 핑계로 일어난 걸로 봐선 [[권신|왕위만 빼앗지 않았을 뿐, 주공이 주나라의 국정을 혼자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였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다만 왕위찬탈자는 그만한 권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와 내 자손이 대대손손 왕이 되느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그리고 문공의 이런 행적은 이후 [[군주]]의 종친 또는 유력자가 [[섭정]]을 명목으로 권력을 장악할 때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써먹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계유정난]] 직후의 [[세조(조선)|수양대군]]이다.] 또한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비슷하게 비판받는 것이 바로 [[선양]]이다. 본디 요가 순에게, 순이 우에게 전위한 것은 일종의 미담이었지만, 훗날 [[조비]]부터 [[태조(조선)|이성계]]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찬탈 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써 악용됐다. '''다만 그렇다고 주공 단을 비판해서는 안 되는 것이, 후대에 문공 핑계를 대던 인간들이 진짜로 찬탈한 것과 달리 그는 어린 성왕을 해하지도 않았고 왕위를 빼앗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랬으면 추앙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문공은 조회를 볼 때면 친히 어린 성왕을 등에 업고 나타나 자신은 그저 왕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하였으며, 성왕이 [[친정|장성하여 직접 정무를 보게 되자]]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심지어 관직에서 물러나라는 그의 요구에도 순순히 따르는 등 매우 모범적인 신하의 모습을 보였다.[* 다만 근시기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주공단이 그만한 찬사를 받을만큼 욕심이 없었다기보다는 주공단 스스로가 가진 권세가 그만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근시기의 기록에 의하면 성왕은 즉위할 때 이미 성인이었다. 왕이 성인이라는 것은 왕의 숙부로서 권세를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족할만한 상황이고 그 이상은 취하기 어렵다. 삼감의 난 역시도 성왕이 직접 친정하였다 되어있다.] 하여튼 문공의 전철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전한]]을 멸하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인데, 왕망은 선양을 받기 직전 전한의 [[망국의 군주|마지막 황제]]인 어린 [[유자영]]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옛날 주공(周公)이 섭위했을 때에는 끝내 복벽하여 성왕(成王)에게 제위를 돌려 드렸는데 지금 나는 천제의 지엄한 명령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구려.'라고 짐짓 탄식했다고 한다. 물론 왕망 따위가 문공의 이름을 판 것 자체가 훌륭한 [[고인드립]]. 훗날 [[조선]] [[세조(조선)|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키며 똑같은 고인드립을 쳤고, [[단종(조선)|단종]]은 수양대군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양대군을 주 문공이라 대접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안평대군|진짜]] [[금성대군|주공들]]과 함께 시해당하고 만다.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의 [[공융]]은 [[조조]]가 [[원소(삼국지)|원소]] 세력의 본거지를 함락하고 원씨 집안의 많은 여자들을 취하고 [[조비]]가 [[문소황후]]를 취하는 것을 보자 "[[무왕(주)|무왕]]은 [[주왕]]을 정벌한 후에 [[달기]]를 주공(周公)에게 주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 일로 세간의 비난을 두려워하던 조조는 공융이 자신을 두둔한다고 착각했다. 워낙에 박식한 사람이었기에 조조 자신이 모르는 경전에서 인용한 것이려니 하고 믿었던 것. 하지만 그 이후 조조가 아무리 책을 들춰 봐도 그런 고사를 찾을 수 없어 공융에게 어떤 책에 나온 이야기냐고 묻게 되었는데, 공융은 태연하게 "지금의 일을 살펴보니 과거에도 당연히 그랬을 것 같았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즉 조조에게 '''너는 역사와 고전을 모르는 무식한 새끼''' + '''남의 처 뺏어다 아들 주는 네놈의 윤리 의식이 레전드'''라고 2단으로 디스를 건 것이다. 조조가 공융이 후일 [[끔살]]을 시킨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런 일도 아예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흠 없는 인물로 추앙받는 주공 입장에서는 은나라를 말아먹은 주범으로 지목된 달기를 취하라는 제안을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 남경 함락 후, 즉 [[정난의 변]]이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영락제|주체(영락제)]]와 [[방효유]]와의 대화에서도 문공과 성왕의 고사가 등장한다. 당연히 성왕은 주원장의 장손인 [[건문제]]를, 문공은 그 숙부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항목 참조. 사실 여기서는 주로 성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주로 나오지만, 이 밖에도 [[상나라]]의 미개한 풍습을 교화하기 위해 애쓴 것도 있어서 그 때문에도 유학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사실 이건 상나라의 미개한 풍습 때문에 주나라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인데 이 풍습이라는 게 식인, 점복, 순장, 제사 같은 것들이었다. 이런 풍습의 공통점은 [[인명경시|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것인데]], [[아즈텍 제국|상나라는 이런 풍습에 사용하는 인간들을 주로 주변국에서 납치해왔던 것.]] 즉, 봉신연의에서 희백읍고를 죽여서 그 아비 희발(주문왕)에게 먹인 일도 완전히 허구는 아니라는 말이다.] 나중에 [[문화대혁명]] 당시에 [[4인방]]이 [[주은래]](周恩來)를 까고 싶었는데, 주은래는 알다시피 인민들의 지지를 받는 거물이었기에 역풍이 불 것을 우려하여 이름이 중의적일 수 있는 주 문공을 대신 깠다는 이야기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