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제(전한) (문단 편집) === [[무고의 화|여태자(戾太子) 사건]]과 쓸쓸한 최후 === 게다가 무제 스스로가 후궁에서의 음모의 결과로 옥좌에 앉았기 때문인지, 옥좌를 둘러싼 음모와 유혈 사태가 그치지 않았다. 기원전 122년부터 종실인 [[유안|회남왕]], 형산왕, 강도왕의 반역 음모가 차례로 발각되어 처형이 줄줄이 이어졌는데,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한 자리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더구나 무제는 가족들에게도 냉혹하고 무자비했는데 말년에는 [[노망]]이 나버려 [[오나라]]의 [[손권]]처럼 모함에 넘어가 황후를 폐위하여 자살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딸인 제읍공주와 양석공주도 간통 및 저주 행위를 했다하여 참수형에 처하였으며, 뒤이어 아들인 여태자 유거(劉據)와 며느리, 손자, 손녀들마저 죽음으로 내모는 과오를 범한다. 무제는 후궁인 구익부인(鉤弋夫人)을 총애하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늘그막에 어린 황자 [[소제(전한)|유불릉]](劉弗陵)을 낳자 태자를 바꾸려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 평소 강직한 성격이라서 태자와 사이가 좋지 못하던 무제의 최측근인 수형도위(水衡都尉) 강충(江充)이 후일 태자에게 보복당할것이 두려워[* 사실 틀린 것도 아닌 것이 태자와 사이가 좋지 못하기에 태자가 황위를 계승하면 가장 먼저 보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이때 무제는 고령에다 건강도 좋지 못하여 사망할 가능성도 놓았기에 강충이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린 상황이었다.] [[무당]]과 짜고 여태자가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을 하자 무제는 여태자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모함으로 인해 궁지에 몰려 화가 난 여태자가 사전에 강충과 무당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지고 만다. 이에 강충 일행과 작당을 하였던 소문이라는 환관이 장안에서 도망쳐 나와 무제에게[* 이때 무제는 건강이 악화되어 장안에서 나와 함양 감천궁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알린다. 무제는 태자가 저지른 살인에 충격을 받았으나 이때까지도 "걔가 두려운데다 강충이랑 원수를 져서 한 일일 것이다."라며 사신을 보내 태자를 다독이면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신이 태자에게 해를 입을 것이 두려워서 태자가 있는 장안에 들어가지 않고 무제에게 태자가 모반하였다고 거짓 보고를 하였다. 이에 노발대발한 무제는 태자를 폐위시키고 체포를 명하였다. 하지만 체포에 불복한 여태자는 거병하여 장락궁의 호위 군사 및 황후궁의 궁노수와 병사를 풀어 장안을 통제하려 했다. 무제는 보고를 받은 후 우선 사람을 보내 동태를 살피게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기세에 밀려 장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와 태자가 기어이 반란을 꾸미고 있으며 사자인 자신도 죽이려고 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그러자 분노한 무제는 관군을 소집했으며 소집된 관군으로 장안을 포위하는 한편 성문을 굳게 닫아 장안 내에서 한 명도 도망쳐 나오지 못하게 했다. 태자는 장안 내에서 간신이 난을 일으킨다고 선포했고 임안에게 북군을 장악하게 했다. 하지만 임안은 북군에 들어가자 태자를 배신하고는 군영의 문을 단단히 닫게 했다. 태자는 장안 동서남북 네 시장에서 인부들을 잡아 병사 수만 명을 충당했다. 이 군대로 그는 관군을 이끌고온 승상 유굴리와[* 무제의 이복형 중산정왕 유승의 아들이다. 그의 아들이 이광리의 딸과 결혼했기에 이광리와는 사돈지간이었다. 유굴리는 여태자 사건 이후 이광리와 함께 창읍애왕 유박을 황태자로 내세우려다 곽양의 폭로로 들통났고 이로 인해 무제의 분노를 사서 조리돌림당하고 허리가 잘려 죽는 요참형에 처해진다. 특히 무제는 유굴리의 가족들도 전부 참수하여 저잣거리에 목이 내걸려 효수했다.] 5일간 혈전을 벌였다. 나중에 장안의 백성들은 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자 점점 유굴리에게 합류했다. 자신의 불리함을 안 태자는 휘하 병사들까지 관군에 항복하자 장안 동쪽 복양문으로 나가 도망쳤다. 반란을 진압한 무제는 장안으로 돌아왔고 명을 내려 여태자의 어머니 [[무사황후 위씨|위황후]]의 인수를 회수하여 폐후로 만들었는데[* 왜냐면 위황후는 태자가 저지른 살인을 알면서도 그를 감싸주었고 용서를 빌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이는 명백한 반역이기 때문이다.] 이에 위황후는 자신의 말로를 예감하고 [[자살]]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정 대신들은 무제한테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누구 하나 말을 못했다.[* 특히 무제는 신하들이 심기를 거슬리게 하면 무자비하게 처벌한만큼 간언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방의 한 장자가 무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부자간에 원수처럼 되지 말아야 하며 태자가 함부로 부친의 군대를 일으킨 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지 결코 모반은 아니라며 사면을 요청했다. 무제는 이 상소문을 보고 다소 감동은 했지만 그렇다고 태자를 용서하지는 않았기에 상소는 소용이 없었다. 결국 태자는 관군의 추격을 받으며 도망치다가 신발 장수의 집에 숨었으나, 결국 발각되자 목을 매어 자살한다. 태자의 두 아들도 관군의 투항 요구를 거부하며 저항하다가 교전 중에 전사하였다. 태자와 아들들을 숨겨준 신발 장수도 관군에게 살해된다. 태자의 후궁인 사양제,[* 양제는 이름이 아니라 태자의 후궁이 받는 품계 가운데 하나다.] 아들 유진, 며느리 왕씨, 딸을 비롯한 태자의 가족과 위황후의 친정을 비롯해 태자를 따르던 이들도 무사하지 못하고 대거 처형당했다. 하지만 여태자의 손자이자 무제의 증손자로 아직 갓난아기였던 유순(劉詢), 훗날의 [[선제(전한)|선제]]는 다행히도 위씨 일족에 의해 목숨을 부지해, 무제와 소제가 사망한 이후 창읍왕을 쫓아낸 [[곽광]]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 원래 여태자의 다음 서열은 제회왕 유굉이었으나 여태자보다도 일찍 죽었고, 창읍애왕 유박을 태자로 삼자는 여론도 있었으나, 그도 얼마 못 가 죽었다. 광릉여왕 유서와 연날왕 유단은 무제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최종적으로 막내 아들 [[전한 소제(8대)|유불릉]]을 태자로 삼았다. 하지만 유불릉의 생모인 구익부인은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때 구익부인은 아무 죄도 없는데 있지도 않은 역모죄로 처형된 터라 신하들이 경악할 정도였다. 그래서 신하들이 이유를 묻자 무제는 '구익부인은 여태후처럼 국정을 농단할 것이니 이를 방지하려고 그랬는데 왜 모르냐'며 오히려 신하들에게 화를 냈다.[* 이때의 일은 자귀모사라 하여 훗날 북위 왕조에서 제도화된다. 그러나 효문제 대에 이르러 폐지한다.] 이듬해에 조사를 거쳐 이 사건은 강충의 무고로 밝혀졌고 증거가 전부 조작에다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무제 역시 태자의 거병도 강충의 핍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거기에 전천추[* 유굴리가 처형당한 후 후임 승상에 임명]의 말을 듣고 감동한 무제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여 아들을 위한 궁궐의 건축을 명해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궁이라는 뜻의 '사자궁(思子宮)'을 지어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강충의 삼족을 멸하고 강충의 일당들을 불태워 죽였다.[* 구익부인을 죽인 것도 강충의 배후에 구익부인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7435|#]] ] 하지만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충격이 심했는지 얼마 안 가 실의에 빠졌고 건강까지 악화되어 병을 앓다가 [[곽광]]과 흉노족 태자 출신인 김일제 등에게 후사를 맡기고는 기원전 87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실 이 당시는 평균 수명이 짧았던 시대인만큼 무제는 상당히 장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