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제(전한) (문단 편집) ==== 신하에 대한 원칙없는 대우 ==== 무제의 문제는 성격이 매우 좋지 않았고 우생학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신하들을 죽이거나 가혹하게 처벌하는 일이 많았다.'''[* 무능한 자들을 제거하거나 죽이면 유능한 자들만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무제 그 자신이 문제가 있었는데 이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한 무제는 신하들을 대우할 때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보였다. 이 때문에 억울하게 죽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예가 바로 '''[[이릉]]과 [[사마천]]'''이다. 이릉은 소규모 병력으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펼치다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흉노에게 투항한 것이다. 게다가 그 절망적인 상황에 빠트린 것에는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않은 무제 본인의 책임이 컸다. 그럼에도 한 무제는 분노만 터뜨려 소식을 전하러 왔던 이릉의 부하 진보락한테 책임을 물어 강제로 자살하게 하였고 평소 이릉과 안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신껏 이릉을 변호한 [[사마천]]에게는 감히 이릉을 변호했다는 이유[* 당시 이릉의 상관이 이광리였는데 이광리는 한무제의 부인이었던 효무이부인(孝武李夫人)의 오빠였다. 그래서 이릉을 변호한 것을 이광리와 그 이광리를 임명한 한무제에 대한 비판으로 읽은 것.]로 처음엔 사형을 명했지만 여기서 사마천에게 알량한 아량을 베푸는 척 하면서 몇 가지 선택지를 줬는데 그 선택지들이라는 게 참으로 골때렸다. 사마천에게 50만 전의 벌금,[* 말이 벌금이지 이 돈이면 오늘날 2021년 현재 기준으로 보면 [[오징어 게임]] 우승 상금과 동급은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큰 돈이다. 당대 기준으로조차 병력 5,000명의 1년 유지 비용([[직업군인]]인 [[중사]] 5,000명의 연봉+a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거액이었다.)이었을 정도이니 일반인이 쉽게 구경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큰 돈이다. 그래도 정말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는 액수는 아니라서 정말 저 돈을 주고 참형은 면한 사람도 있긴 하다. 근데 그 사람도 대신 평민으로 강등당했다는걸 보면 설사 사마천에게 돈 50만전이 있었는들 그리 편한 선택지는 아닌듯.] [[궁형]], [[사형]] 중에서 선택하도록 했는데, 어지간한 재력가들조차도 갖고 있을리가 없는 큰 돈을 관리에 불과한 사마천이 보유했을리가 없다.[* 저 당시 기준으로 관리로서 저런 돈을 보유하려면 그 직급이 [[대장군]]이나 [[대사마]] 이상은 되어야 한다. 참고로 둘이 같은 [[계급장]]이지만 대장군은 무관직, 대사마는 문관직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래도 사마천은 [[사기(역사책)|자신이 한창 집필중이던 사서]]를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굴욕도 감내하고 살아남아야만 했으므로 결국 궁형을 택했고 무제는 사마천이 택한 대로 궁형을 집행했다. 이후 다시 후회하였는지 이릉 구출 작전을 시도하였지만, 문제는 무제가 이릉이 흉노의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헛소문[* 엄밀히 말하자면 흉노의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 훈련시킨 사람이 이릉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로, 이서(李緖)라는 또다른 한나라 출신 항장이 가르쳤는데 이름이 비슷해서 구출작전에 나선 장졸들이 잘못 들은 것이었다.]만 듣고는 알아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킨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이릉은 큰 충격을 받고는 분노하여 탈출할 생각을 접고 정말로 흉노에게 전향해서, 흉노의 장군이 됐으며 후일 한나라의 전향 설득을 대놓고 거부하기까지 한다. 괜히 제대로 된 확인도 없이 일을 키운 셈인데 실질적인 책임은 무제 본인에게 있음에도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 이를 변호한 사람을 도리어 처벌한 것. 이 이릉과 사마천 이야기는 한 무제의 성격의 문제점을 비판할 때 많이 인용하는 이야기이다.[* 참고로 적어도 무제는 그래도 홧김에 사마천을 고자로 만들어놓고 나중엔 미안했던지 사마천을 벌해야 한다는 사람들을 싹 죽이고(...) 사마천을 불러다 "그깟거(?) 없는게 뭐가 대수냐 겨우 그거 없는걸로 기죽지 마라"라는 위로(?)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이렇게 이릉과 사마천을 천시하면서까지 한 무제가 편애했던 이광리는 훗날 흉노와 싸우던 도중 후사문제[* 이광리가 승상 유굴리와 함께 자신의 외조카인 창읍왕 유박을 황태자로 내세우려다 이를 내자령 곽양이 무제한테 고발하는 바람에 유굴리는 허리가 잘렸고 일족도 목이 날아갔다. 이 소식을 접한 이광리 또한 이 소식을 접한 뒤에 패하고 흉노에 투항해버렸다. 실제로도 연연산(燕然山) 전투의 패배는 한나라에게 타격이 컸는데 이광리가 이끌던 한나라의 정예 병력 7만이 흉노의 호록고 선우의 5만 흉노군한테 대패하여 궤멸되었기에(기록에서 살아돌아온 사람이 천 명에 한두 명이라 할 정도라고 적었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무제는 그동안 추진해왔던 흉노 정벌을 포기해야만 했다. 물론 진짜 이유는 무제가 일으킨 전쟁과 토목공사로 인해 악화된 재정 문제가 컸지만. 특히 높은 세금을 견디다 못해서 일어난 폭동들까지 발생한 상황이었다.]에 휘말리자 패하고 흉노에 투항했다. 물론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한 무제는 장안에 남아 있던 이광리의 일족을 몰살했다고 한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훗날 서구권에서도 인정하는 역사가로 이름을 새긴 사마천을 인성질로 조지고, 당대에나 후대에나 영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 이광리는 흉노 원정 이전에 대완국 원정을 나간 적이 있었다. 이 때 "이사성(貳師城)에 가서 좋은 말을 취하겠다"며 이사장군(貳師將軍)이라 거창히 호칭하고 진격했으나 성 하나 점령 못하고 사상자만 내면서 빌빌댔다. 그래서 회군하려고 했으나 한무제는 "돌아가면 목을 베겠다"며 옥문관(玉門關)을 틀어막아 하릴없이 싸워야 했다. 그나마 한무제가 일단 지원을 보내줬고, 지원을 받은 이광리는 제대로 싸워 대완을 평정하고 돌아왔지만 피해가 많았다. 당시 이광리의 형제 이연년과 이계가 간통으로 처형되었는데, 한무제는 이런 이광리를 딱히 여겨 해서후(海西侯)에 봉했다. 한마디로, 대완 원정도 사람들만 무수히 전장에서 버리고 얻은 전과였던 것. 앞서 이릉이 항복한 흉노와의 전투에서도 이광리는 어느 정도 승승장구하다가 흉노 본대와의 전투에서 대패, 조충국(趙充國)의 활약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광리를 싸고돈 점에서 한무제의 성격과 인재 안목은 좋게 봐주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한 무제가 인재 채용에 조건과 자격을 가리지 않아 곽거병이 사로잡은 흉노족 왕자인 [[김일제]](金日磾)나 상관걸, 상인의 아들 상홍양, 이광, 장건 등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 발탁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전반적으로 무제는 신하들에게 무자비하며 가혹한 군주였고 이 정도의 인물 발탁은 다른 군주들도 그럭저럭 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이다.[* 한무제 재위기간 임명된 13명의 승상 중 3명이 자살, 3명이 참살당했고 집안이 멸족된 이가 수 없이 많았다. 또 특정 신하들에 대한 편애나 혐오가 심했는데 앞서 사마천이나 이릉의 일 이외에도 [[김일제]]의 아들은 감히 황제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장난을 치는, 자칫하면 대역무도로 몰릴 수 있는 짓을 하였음에도 그를 총애했으나 [[이광]]과 같은 이는 운수가 사납다는 이유로(...) 위청에게 대놓고 전장에서 멀리 둘 것을 지시하였다. 이 일이 꼬여 결국 맹장으로 이름났던 이광은 자결하고 만다.] 곽거병, 곽광 형제나 위청, 이광리 같은 인물은 무제의 인척이었다.[* 곽거병이나 위청 같은 경우도 무제의 안목이 뛰어났다기보단 낙하산 인사가 의외로 능력이 있었던 운좋은 경우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는 애매한데 '박사'는 이미 전국 시대부터 각국에 설치된 관직이었으며 진나라에서도 이 제도를 따랐고 진의 제도를 받아 이은 한(漢)에서도 숙손통(叔孫通) 이후 여러 종류의 박사를 두었다. 이것이 오경박사에까지 진전시킨 것은 무제(武帝) 즉위 초년의 동중서(董仲舒)의 상주로 이루어졌고 각 박사관에 제자 50명을 증원하며, 유학의 교양이 있는 관리를 특히 승진시키는 방침이 취해져 이로서 유학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정작 한무제는 인재를 보는 안목이 그리 좋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고조선 정벌 시기의 일을 들 수 있다. 한무제가 양복을 누선장군, 순체를 좌장군으로 삼아 [[고조선]]을 침공하게 했을 때, 양복은 단독으로 왕검성을 공격했다가 격파당해 10여일을 숨어있었으며, 그나마 수도 왕검성 내부의 갈등을 이용해 조선 멸망의 공을 세운 순체조차 양복과 대립하다가 공손수에게 양복을 모함해 공손수에게 양복을 체포하게 만드는 등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으며, 그 이전에는 고조선에 굳이 누가 봐도 받아들이기 힘든 항복조건을 강요해서 차라리 저항하도록 만들어 일을 키워버렸다. 순체와 양복의 중재자로 파견된 공손수는 엄연히 사정을 제대로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았음에도 순체의 말만 듣고 양복을 독단적으로 체포하여 황제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했다. 물론 처벌은 제대로 이뤄져서 순체와 공손수를 처형하고 양복은 속전을 받는 대가로 평민으로 강등시켜 쫓아내는 등의 조치를 했으나 애초에 중책을 맡을 수 없는 세 무능력자들에게 중책을 맡겨 일을 엄청 키운 본인은 정작 책임을 지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