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제(전한) (문단 편집) == 평가 == '''[[한나라]]를 대표하는 황제'''로서 그에 맞는 많은 업적을 세웠지만 다혈질적인 성격과 무리한 원정, 토목 공사들로 인해 '''역사가에 따라서 [[성군]]이나 [[명군]]인지 아니면 [[폭군]]이나 [[암군]]인지,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양면적인 황제이다.''' 한나라의 420년이라는 기나긴 전후한 역사 속에서 오랜 기간(54년) 재위한 황제였다.[* 이 기록은 [[청나라]] [[강희제]]의 61년 치세에서 비로소 깨졌다.] 동쪽의 [[고조선]]과 남쪽의 [[남월]]을 정복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북쪽의 [[흉노]] 제국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으며, 서쪽으로는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등 사방에 걸친 대규모 정복전쟁으로 굵직한 전쟁사적 업적들이 꽤 있어 중국사 전체를 놓고 봐도 언급이 많이 되는 황제이다. 또한 한국사에서는 [[고조선]][* [[위만조선]]]을, 베트남사에서도 [[남월]]을 멸망시켜 중요한 황제이다. 또한 [[전한]]의 법령을 완성시키고, 관료체계를 완비하며, 염•철 전매법, 균수법, 평준법 등의 경제 정책을 시행했다. 한무제의 정책은 [[후한]] 이후까지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으며, [[유학(학문)|유학]] 또한 그의 시대에 국학의 위치로 올라섰다. 정리하자면 [[시황제|진시황]]과 [[고제(전한)|한고조]]에 의해 건설된 광활한 통일 [[중화제국]]이 무제 유철의 긴 치세 때, 비로소 그 최강의 황금기를 구가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모적인 대원정을 일으키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황릉을 짓는 등 큰 규모의 토목 공사를 동시에 단행했으며, 이로 인해 심각하게 낭비된 제국의 재정을 충당하고, 무리한 정복 전쟁으로 인한 군비 확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세와 세금의 신설을 단행해 군중들의 삶이 고달파지게 되었다. 또한 재위 초기에는 [[신비주의]]를 배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이에 빠졌다가 황후, 황태자와의 내전, 즉 [[무고의 화]]라는 피비린내나는 참혹한 비극을 겪기도 했다. 한나라를 엄청난 군사 제국으로 성장시킨 큰 업적들도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 있지만, [[문제(전한)|할아버지]]와 [[경제(전한)|아버지]]가 [[문경지치|이룩한]] 한제국의 국력을 대거 낭비하는 등 폐해도 상당히 남긴 황제이기 때문에 명군과 암군의 경계선상에 애매하게 걸쳐져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성격이 꽤나 다혈질이었는지 심기를 거스르게 하면 혈족이라도 용서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죽였다. 특히 그의 치세하에서 고문당하거나 잔혹한 형벌로 죽은 자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게다가 알고 보면 큰 잘못도 없는 [[사마천]]을 [[고자]]로[* 자신 비위를 안 맞췄다고 그랬는데 원래는 죽일 생각이였겠지만 그에게 선택지를 주자 대의를 의해 의외(?)로 굴욕을 참고 궁형을 선택한 것이다. 자세한건 사마천 항목 참조.] 만들어버리기도 했고, 애먼 [[이릉]]의 일족을 몰살시켜 이릉이 [[흉노]] 제국에 투항하게 만들었으며, 본의는 아니지만 [[괴철]]의 [[피휘|이름을 바꾼]] 황제이기도 했다. 또한 중국 역사상 최초로 [[연호]]를 사용한 황제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복잡다단한 황제. 그의 치세를 상징하는 단어로는 '''한무성세(漢武盛世)'''가 있으나,[* 물론 상기했듯 한 경제의 업적을 한 무제가 날로 먹으려 끼어든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많다.] 그보다는 '''진황한무(秦皇漢武)'''가 더 많이 쓰인다. 여러모로 [[시황제|진시황]]과 비슷하게 업적도 과오도 뚜렷한 황제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어찌보면 진시황보다 더 심한데, 진시황은 거슬리는 말을 듣더라도 일단 머리를 식힌 다음 옳고 그름을 따져보고 나서 죽일지 말지 결정했지만[* [[분서갱유]]도 그렇고 나름 진시황 기준으로는 나라를 위해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자식들에게도 잔혹한 무제와 달리 진시황은 아들인 [[부소]]가 간언을 했을 때 크게 화를 내며 변방으로 쫓아냈지만 죽이지는 않았고 임종이 왔을 때도 부소를 후계자로 임명했다.] 한 무제는 그런 것도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다행히도(?) 한나라가 바로 멸망하지 않았다는 점 뿐이었다. 사실 그러니까 [[미화]]를 해서 '''한무성세'''니 하고 치켜세워 주는 것이겠지만, 실제론 무제는 [[폭군]]이자 [[암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그 "한무성세"를 위해 한나라는 재정이 파탄나는 큰 대가를 치루고 나중에는 멸망의 계기가 되고 만 것이다. 개인으로서는 똑똑했을지 몰라도 황제로서는 훌륭하다고 보기 어려운 케이스다. 또, 이에 대해서 흥미로운 주장도 있다. 독일의 중국사학자 [[https://de.wikipedia.org/wiki/Hans_van_Ess|한스 반 에스]]는 꽤 과감한 내용을 담은 연구를 하나 내놓았다. 그는《[[사기(역사책)|사기]]》에 서술된 [[진(영성)|진]] [[시황제]]의 전쟁사적 행적을 세밀하게 분석해보면, 상당 부분이 한 무제의 군사적 행적들과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으며,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그런 부분들이 너무 많고,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해당 구절들에 대한 상당히 꼼꼼한 대조와 분석의 결과, 반 에스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사마천의 본래 목적은 시황제와 진나라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무제를 비판하려는 것이었다."라는 것이다. 물론 이 주장은 의고의 전통이 강한 서구의 중국사학자들의 주장 중에서도 조금 심하게 많이 나간 케이스고, 대다수는 [[사마천]]의 서술이 대체로 신뢰할 만한 사료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반 에스가 내놓은 주장의 가치도 분명하다. 피네스(Pines)는 반 에스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특히 교차 검증을 할 수 있는 독립된 사료가 부재할 때]에 대해 경종을 울린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 위의 총평 문단이나 행적만 봐도 한 무제의 정치는《[[시황제|진시황]]본기》의 행적과 너무나도 동일, 아니 하위호환이라는 게 문제다. --하위호환이라 더 심각한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