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제(양) (문단 편집) == 개요 == >「'''[[양(남조)|양나라]] 가문이 개국한 지 오십 년, [[중국|천하]]는 편안해졌다.'''」 >---- > 「[[梁]][[氏]][[享]][[國]][[五]][[十]][[年]],[[天]][[下]][[且]][[小]][[康]][[焉]]。(양씨향국오십년, 천하저소강언)」 >---- > [[명말청초]]사상가, 학자『왕부지(王夫之, 1612 ~ 1692) 저(著) 《독통감론(讀通鑑論)》 中』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의 세 번째 왕조 [[양(남조)|양(梁)]]의 초대 황제. 본래 [[제(남조)|제(齊)]]의 방계 황족[* "황족"이라고는 하나 남제의 시조인 소도성과는 9촌 뻘로 먼 촌수였다.][* 헌데 9촌이면 현대에서나 멀다고 느껴지지 일족이 집성촌을 이루던 고대에는, 더군다나 황족이라면 비록 '당외'로 가까운 혈족이라고 보기는 어려워도 결코 먼 촌수가 아니다. 사실 현대에도 윗대가 외동이라서 (출산율이 높던 시대에도 일제강점기 징용과 한국전쟁 등으로 인해 몇 대 독자 가문이 심심찮게 있었고 이들은 병역도 독자(獨子) 사유로 인해 면제나 방위 판정을 받았다) 6촌, 8촌 형제 등이 없으면 10촌, 12촌 형제 정도까지는 마냥 먼 친척이라고 보기도 어렵다.]으로 자신을 죽이려던 황제에 반기를 들어 정국을 장악하고 끝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묘호는 고조(高祖)이고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며 휘는 소연(蕭衍)으로 자는 숙달(叔達), 아명은 연아(練兒)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