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제(북주) (문단 편집) ==== [[삼무일종폐불]] ==== 570년, 무제는 [[불교]]와 [[도교]]의 사제들을 모아 놓고 서로 논쟁을 벌이도록 했다. 무제 우문옹은 도교쪽에 조금 더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 관련 관직인 통도관(通道觀)을 설치하고, 도교에 관한 백과사전인 《무상비요》(無上秘要)를 편찬하게 했다. 사실 이 사소했던 일이 폐불정책으로 확대된 계기는 북주가 갖고 있었던 사회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북주의 인구는 1,000만명이 조금 되지 않았다. 그러나 100만 명가량이 승려였으며, 10,000여 곳에 사찰이 있었다. 불교는 북위의 국교가 된 이래 세력이 매우 방대해져 있었기 때문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불경이나 불상 건설을 위해 많은 인력과 재력을 소모했다. 결국 무제 우문옹은 이를 부국강병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다. 574년, 유학자들과 도교 및 불교가 갖고 있는 철학에 대해 두 번째 [[100분 토론|논쟁을 벌였다.]] 이때 무제는 [[유교]]를 첫 번째, 다음은 도교, 그 다음을 불교로 지정했다. 이때부터 도교와 불교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도교에 대해서는 형식적이었다고 한다. 불경과 불상들을 불태우고, [[승려]]들은 강제로 서인으로 만들어서 사회에 환속시켰다. 이를 '''[[북주파불]]'''(北周破佛) 또는 북위 [[태무제]]에 이은 '''제2차 삼무일종의 폐불'''이라 부른다. 과정은 좋지 않았지만 이로 인해 중앙집권화와 지배체제의 정비가 빠르게 진행되어 [[결과는 좋았다|결국에는 국력이 성장했다]]. 여담으로, 이 일에 대해서 >"이런 짓을 하면 불[[지옥]]에 간다." 라는 승려들의 비난에 >"백성들이 편할 수만 있다면 내 몸이 불지옥에 가도 상관없다." 라는 위엄찬 태도로 받아버렸다. 과연 후대 불교 설화들에서는 무제 우문옹을 불지옥으로 보내서 지옥에서 >"불교를 박해하지 말걸." 하고 후회하고 있다는 [[디스]]성 이야기들이 덧붙여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