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제(북주) (문단 편집) === 재위 초기 === 우문옹이 황제가 되었지만 실권은 여전히 우문호가 장악하고 있었다. 우문옹은 두 형이 유능함을 보여주다가 제거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위 초반기에는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세력을 조금씩 만들어 나가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560년, [[양(남조)|양나라]]의 장군 왕림과 그가 황제로 세운 [[영가왕|소장]]이 [[진(남조)|진나라]]와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소장은 [[북제]]로 도망쳤으며, 그의 영토는 북주와 진나라가 각각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양국간 긴장이 높아지자, 겨울에 북주의 장수 하약돈(賀若敦)과 독고성(獨孤盛)이 진나라 장수 후전(侯瑱)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 초반에는 북주가 우세했지만, 날이 갈수록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561년, 결국 북주군이 고립상태에 빠지자 진나라가 평화협상을 제의했고, 562년 북주는 오늘날의 호남성(湖南省) 일대 영토를 진나라에게 돌려주는 대신, 포로로 잡혀 있었던 진나라 황족 [[선제(남진)|진욱]]과 그의 아들 [[진숙보]]를 돌려보내 주었다.[* 진욱은 훗날 진나라의 폐제 [[진백종]]을 몰아내고 제4대 고종 선제가 되었다.] 그런데 진욱과 진숙보 부자를 돌려보냈다는 소식에 우문호는 분노하여 제멋대로 하약돈을 파직시켰다. 564년, 숙적인 [[북제]]와 적대 관계였던 북주는 [[돌궐]](쾩튀르크)과 동맹을 맺고 북제를 침공했다. 북주군은 북제 제2의 수도인 진양(晉陽)으로 쳐들어갔지만, 북제의 명장이었던 단소(段韶)와 [[곡률광]]에게 막혀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우문호는 북제에 평화 사절을 보내 북제에 억류되어 있었던 어머니 원씨와 그의 고모(삼촌 우문태의 여동생)을 돌려달라는 이야기를 했고, 북제의 무성제 [[고담(북제)|고담]]이 이를 승낙했다. 어머니가 돌아오자, 우문호는 매우 기뻐했고, 전국적으로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돌궐과의 관계가 틀어졌다. 565년, 무제가 우문순(宇文純)을 사신으로 돌궐로 보냈을 때 돌궐의 목간가한(木杆可汗)은 이들을 포박해 사로잡았다. 567년, 진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상주(湘州)자사 화교(華皎)가 북주 및 [[후량(남북조시대)|후량]][* 양나라 황족 [[소찰]]이 [[우문태]]의 도움을 받아서 세운 강릉 일대의 괴뢰 정권이었다.]에 도움을 요청했다. 무제는 동생 우문직(宇文直)을 파견했지만, 진나라의 명장 오명철이 이를 격파하고, 북주와 후량의 일부 영토를 점령했다. 진나라는 한때 후량의 수도 [[형주#s-3|강릉]]을 점령할 뻔했지만, 결국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을 두고 우문호는 굉장히 화를 내며 황제의 허락도 받지 않고 우문직을 파직했다. 이때부터 우문호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터져 나오기 시작했지만, 무제 우문옹은 신중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568년, 무제는 돌궐과 진나라, 양쪽에 적이 있는 것은 감당하기 힘들다고 보고, 다시 돌궐과 화친해 목간가한의 딸을 황후로 삼았으나 [[정략결혼]]이라 우문옹은 그녀를 쌀쌀맞게 대했다. 돌궐도 이 정략결혼에 응답해 포로로 잡혀 있었던 우문순을 돌려보냈다. 이처럼 무제 우문옹은 재위 초반기에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며 국가를 안정시켰지만 어디까지나 권신 우문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였고, 겉보기에는 어리석게 행동했기 때문에 우문호는 여전히 그를 만만히 여겼다.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하지만 무제 우문옹은 사촌형인 우문호가 국정을 마음대로 전횡하며 불만이 계속 쌓이고 있어서 반대파들이 늘어나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