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왕(발해) (문단 편집) === 신라의 개입과 자객 === 발해군의 기습 공격을 전해듣고 분노한 [[현종(당)|당현종]]은 급히 토벌군을 보냈지만 발해군의 기세를 누르지 못했다. 당황한 [[당나라]]는 [[나당전쟁]] 이후 서먹한 관계였던 [[신라]]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733년 1월 신라의 [[성덕왕]]은 약속대로 병력 10만 명을 파견했지만, 기록상으로는 추위와 눈보라 때문에 신라 군사 중 절반이 죽어 발해와는 제대로 된 전쟁도 못 해본 채 성과없이 돌아왔다. 다만 기록에는 신라 병력 10만 명 중 절반이 죽었다고 되어 있지만, 과연 신라가 이 정도로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며 무리한 공격을 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지는 견해도 있다. 신라보다 인구와 군사 동원 규모가 더 많던 고려와 조선조차 20만명은 국민을 거의 총동원해야 가능한 병력이었는데, 10만명을 동원했다가 절반이 죽으면 발해 측에 역공을 당해도 군사가 없어 손을 쓸 방법이 없어진다. 즉 10만 명 자체가 이후 소손녕의 허세처럼 실제로는 1~2만 명을 부풀렸을 가능성이 크거나 아예 처음부터 신라는 싸울 생각이 없었고 공격하는 '''척'''하기만 하고는 당나라에 엄청 공격을 세게 한 것처럼 거짓으로 알렸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건 [[나당전쟁]]으로 서먹서먹했던 관계를 풀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신라는 이때 (큰 병력 손실이 없었다는 전제하에) 외교적으로 이득을 얻었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어쨌건 당은 나당전쟁에서 패한 뒤 사실상 묵인했던 대동강 이남 지역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이때 정식으로 인정했고, 신라는 다시 당과의 외교관계를 회복했다. 게다가 발해라는 신흥강국의 부상으로 당과 신라는 고구려 시즌2인 발해 견제를 위해 손을 잡은 면도 있었을 것이다. 대동강 이남의 경우, 당나라에게는 먹지도 못하는 떡이니 신라 소유를 인정해주고, 신라는 아예 뒷말 나올 일 없애서 좋으니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한편, 신라군이 퇴각했다는 소식에 급해진 [[현종(당)|당현종]]은 [[발해]]를 직접 공격하기로 했다. 총사령관은 그동안 숨어 있었던 동생 [[대문예]]. 이에 분노한 무왕 대무예는 당나라 제2의 수도였던 낙양으로 자객을 보내서 동생 대문예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이런 당나라의 대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진 대담한 암살기도에 당현종도 대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