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왕(발해) (문단 편집) === 1차 침공 - 등주성 전투 === 무왕은 장군 [[장문휴]]에게 당 침공을 명했다. 732년 9월 드디어 출격 명령이 내려졌다. 발해 수군 함대는 황해로 진격했다. 목적지는 중국 산동반도 [[https://www.google.co.kr/maps/place/%EC%A4%91%EA%B5%AD+%EC%82%B0%EB%91%A5+%EC%84%B1+%EC%98%8C%ED%83%80%EC%9D%B4+%EC%8B%9C+%ED%8E%91%EB%9D%BC%EC%9D%B4+%EC%8B%9C/@37.7321826,119.8510775,7z/data=!4m5!3m4!1s0x3591aa98cd3af993:0x136b0f63db4d4441!8m2!3d37.810661!4d120.758848!5m1!1e4?hl=ko| 등주]](지금의 산동성 펑라이 시)였다. '''당시 등주는 북방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로 무역의 거점이었다'''. 수많은 무역선들이 항로를 따라 등주로 들어왔다. 또한 등주는 당나라 수군의 거점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배를 출격시킨 곳도 이곳 등주항이었다. 만약 [[당나라]]가 발해를 친다면 당나라의 군사는 등주항에서 출발할 것이었다. 선제공격으로 당나라 수군 거점을 무너뜨려야 이후 당군의 반격을 원천봉쇄할 수 있었다. 732년 9월 5일 발해군은 마침내 등주성을 침공했다. 발해군의 기습적인 상륙작전에 당나라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고, 등주 자사 위준이 발해군에게 살해되었다. 기습 선제공격은 대성공이었다. 당시 발해 수군의 상륙전이 당나라에 끼친 결과는 엄청났다. 《[[신당서]]》<오승자전>을 보면 발해군의 침공으로, 성읍이 도륙되었고, 많은 유민과 실업사태를 일으켜 '''등주라는 항구도시를 완전히 파탄시켰다고 쓰여 있다'''. 엉망이 된 등주를 재건하고, 전쟁으로 발생한 실업자들을 구제하기위해 세금을 해마다 30만의 규모로 줄이는 긴축재정을 펴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등주의 복구를 위해 다른 데에 예정된 30만의 세금 지출계획을 바꿔, 용도를 변경하여 지출해야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