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령왕 (문단 편집) === 출생 === 애매하지만 전대 왕인 [[삼근왕]]과 손자인 [[위덕왕]]과 함께 생몰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백제 군주다. 《[[일본서기]]》에서 461년에 태어났다고 전하고 있지만, 실제로 [[무령왕릉]] 발굴 결과 523년에 사망할 당시 62세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세는나이를 썼는지 연 나이를 썼는지 알 수가 없지만 [[교차검증]]까지 확실히 마쳤다. 즉위도 40세 혹은 39세에 했으니 늦은 편이었지만 장수했다. 만약 동성왕 대신 바로 즉위했으면 44년을 재위할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재위 44년의 위덕왕과 맞먹는다.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조선]]의 [[현종(조선)|현종]], [[대한민국]]의 [[이명박]]과 더불어 [[외국]]에서 태어난 몇 안 되는 [[한국사]]의 지도자이다. 동성왕이 [[개로왕]]의 동생인 [[부여곤지]]의 아들이며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다는 통설에 따른다면 동성왕의 출생이 [[부여곤지]]의 도왜 이후가 되므로 정황상 동성왕 역시 외국에서 태어났다고 봐야한다. 다만 무령왕은 일본 본토 출생은 아니고 중간에 기착했던 섬에서 태어났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개로왕]]의 아들이거나 부여곤지의 큰아들이다. 부여곤지가 왜국으로 파견나갈 때 [[임신]]한 개로왕의 부인을 데려갔고, 그때 낳은 아이가 사마, 즉 무령왕이었다고 전한다. 한때 거의 무시되었지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출생 연대와 《일본서기》에서 전하는 부여곤지의 왜국 파견 시기가 일치하고, 유사점이 보여 이를 지지하는 입장이 늘어났다. 《일본서기》 [[유랴쿠 덴노]] 5년(461년) 4월조에 따르면 개로왕은 아우인 부여곤지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낼 때 곤지의 간청에 따라 자신의 임신한 부인[* 원문에서는 '군부(君婦)'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을 곤지의 아내로 삼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가는 도중 개로왕의 부인이자 부여곤지의 새 아내가 산기를 느껴 지금의 [[사가현]] 북쪽에 있는 [[섬]]인 카카라 섬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낳았다. 무령왕의 다른 이름 '사마왕(斯麻王)'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6월 병술 초하루에 임신한 부인이 [[개로왕|카스리노키시]](加須利君, 개로왕)의 말처럼 츠쿠시(筑紫)[* 고대~중세 일본의 영제국(令制國)이었던 츠쿠시국(筑紫國)을 말하며, 현대의 [[후쿠오카현]]에도 그 지명의 흔적으로 [[치쿠시노시]]가 남아있다. 츠쿠시국은 해안까지 포괄하는 넓은 행정구역이었던 반면, 현대의 치쿠시노시는 내륙에만 걸쳐있다.]의 카카라 섬(各羅島)[* 현 사가현 카카라섬(加唐島). 한자 표기만 다르고 이름은 그대로이다. 원문에는 카카라노시마라 되어 있는데, 가운데의 노는 명사의 일부가 아니라 그냥 [[조사(품사)|조사]]이다.]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세마키시(嶋君)라 하였다. 이에 [[부여곤지|코니키시]](軍君, 부여곤지)가 곧 배에 태워 세마키시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가 무령왕(武寧王)이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님|니리무]][[섬|세마]](主島)라 불렀다. >---- >《[[일본서기]]》 권14 [[유랴쿠 덴노]] 5년([[461년]]) [[http://contents.nahf.or.kr/item/level.do?levelId=ns.k_0024_0060_0030_0010|#]] 부여곤지가 일본으로 넘어가던 중 카카라 섬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낳았는데,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마왕'이라 하기도 한다. 《일본서기》는 무령왕의 이름을 [[고대 일본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백제어]])를 그대로 옮겨 '세마키시(도군, 嶋君)'라고 전하였다.[* '키시'는 [[백제]]의 왕호로 잘 알려진 [[건길지]]의 길지(吉支)를 음차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 한국어]]로 된 《[[광주천자문]]》에서도 임금 왕([[王]])의 훈을 '긔ᄌᆞ'라고 달았기 때문에, 해당 단어는 [[기자(상)|기자]]와의 연관성이 주목되기도 한다.] 무령왕이 태어난 섬의 [[동굴]]에는 관련 [[설화]]가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덧붙여서 [[서동요]]에 나오는 [[서동]]으로 추정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사실 무령왕의 출신은 불분명하다.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사촌 혹은 [[부여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이복형이라는 것은 《일본서기》의 기록이고[* 부여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이복형이라는 것은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신찬]]》의 기록이며, 개로왕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사촌이라는 전승은 《일본서기》의 다른 권에 실려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동성왕의 차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왕사]] 문서에 있는 가계도나 [[한국사]] [[교과서]] 등의 왕계표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른 것이라 일단 그렇게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무령왕릉]] 발굴 결과 무령왕이 동성왕이나 [[삼근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져서 현재는 《일본서기》의 기록 쪽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일본서기》에서도 2가지 전승에 대해 어느 쪽이 맞는지 우리도 정확히는 모르겠다는 구절이 나오며 동성왕은 [[문주왕]]의 아들이라는 가설도 있어서 무령왕과 동성왕의 혈연 관계가 정확히 어떠한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무령왕이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윤색의 결과라는 학설이 존재한다. 《[[일본서기]]》에서 두 가지 설을 언급하는 이유 또한 무령왕의 생물학적 친부로 추정되는 부여곤지의 후손이 전하는 전승과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손이 전하는 전승이 상충하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