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령왕 (문단 편집) ===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 ===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443년 또는 503년) 8월 10일(日十)(?) 대왕년(大王年)(?), 남제왕(男弟王)이 오시사카궁(意柴沙加宮)에 있을 때 '''사마(斯麻)'''가 장수를 염원하여 카와치노 아타이(開中費直)와 예인(穢人) 금주리(今州利) 2명 등을 보내어 양질의 구리쇠 200한(旱)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다. 현전하는 일본 [[금석문]] 중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 스다하치만 신사(隅田八幡神社) 소재의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가 무령왕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사실 무령왕의 남동생이 [[케이타이 덴노]]였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아래의 김현구 교수이다. 문면에 등장하는 사마가 무령왕이라는 주장에는 반론이 많지 않지만, 케이타이 덴노가 무령왕의 동생이라는 김현구의 주장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또한 홍성화의 경우 남제왕(男弟王)을 [[동성왕]], 사마를 무령왕으로 비정하기도 했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104/117297810/1|#]] 논쟁의 중심은 '사마(斯麻)'의 표기 방식이다. 이 [[거울]]의 제작 연대인 [[계미]]년(癸未年)은 60으로 나누어 23이 남는 해이고, [[유물]]의 특징을 고려하면 [[443년]] 또는 [[503년]]으로 추정된다. 무령왕은 461년생이므로, 사마(斯麻)가 무령왕이라고 주장하려면 이 거울은 503년에 제작되었어야 한다. 이 명문에서는 제작 경위와 관련된 인물로 대왕(大王)과 남제왕(男弟王), 사마(斯麻)가 등장하는데, 전근대 기준에서 일국의 [[국왕]]을 아무런 존칭 없이 이름만으로 부르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다. 이 금석문을 새겼을 인물이 당연히 [[왕족]]보다 지위가 낮았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만약 [[김운회]]의 주장대로 [[일본]] 열도의 [[정권]]이 백제의 분가였다는 식으로 해석하려면 당연히 '대왕'이 무령왕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앞서 등장한 '대왕'을 존칭 없이 이름으로 재차 적었다는 것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아예 처음부터 '사마대왕(斯麻大王)'이라고 썼다면 모를까.] 대표적으로 [[무령왕릉]] 지석에서도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하여 [[중국]]으로부터 받은 책봉호와 '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쓰고 있다. 쉽게 말해 원래는 '문하심'이라고 써야 하는 것을 격식 다 치우고 쓴 격이다. 만약 이것이 성립하려면 '사마'가 '대왕' 또는 '남제왕'보다 하위 인물이거나, 무령왕을 '사마'라고 기록한 인물이 [[백제]]의 국왕 칭호를 신경쓰지 않는 외부 인물이어야만 자연스럽다. 백제가 일본 [[열도]]를 정복했다고 하면서 양자가 [[정치]]적으로 분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김운회의 논지를 따르면 정작 [[백제]]가 [[케이타이 덴노]]의 하위 인사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논지는 상술한 김현구와 홍성화의 학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학계에서는 문제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허나 후술할 권오영 [[서울대]] 교수가 말했듯이 오호도(男弟)은 케이타이 덴노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본명이며, 사마(斯麻) 또한 무령왕의 본명이기 때문에 격식을 무시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물건을 주고 받았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이 경우 명문이 작성되었을 503년은 무령왕이 이미 왕위에 오른 후이기 때문에, 왕이나 대왕의 칭호가 누락된 까닭은 의문이다. 또한 진짜 무령왕의 친동생이 [[케이타이 덴노]]가 맞다면 거울 또한 사사로이 사여한 물건이기 때문에, 대왕의 칭호를 누락하고 격식을 버렸다고 해도 별로 문제는 없다. 4~5세기에 제작된 [[칠지도]] 후면에도 "왜왕 진(旨)을 위해 만들었다(爲倭王旨造)"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인물화상경의 문면이 특수한 경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어째서 《[[일본서기]]》에서 기록되어 있는 '남대적왕(男大迹王)'이라는 호칭 대신 '부제왕(孚弟王)'이라고 거론하며 다소 무례하게 기록했느냐는 의문점도 있지만, 문면 그대로 판독하면 [[외교]] 관례나 칭호에 대한 이의 제기는 부적절하다고 반론할 수 있다. 즉 무령왕과 [[케이타이 덴노]]가 사적으로 친하거나 형제 관계였다는 대전제를 깔고 문장을 판독하기 때문에 "청동거울을 주고 받은 인물이 무령왕과 케이타이 덴노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덧붙여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청동 거울만 보더라도 '사마'가 누구를 지칭하는 호칭인지는 따져볼 껀덕지도 없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거울의 제작 시기는 503년이므로 [[케이타이 덴노]]의 즉위 년도인 506년과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별로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연대에 크고 작은 오차가 많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케이타이 덴노는 즉위년에 있어 3년 정도의 오차가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유사역사학자]]로 악명 높은 김운회의 해석을 인용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서술하는 경향이 있지만, 주류 사학자이자 일본사 연구자 [[김현구]] 또한 비슷한 추론을 했다는 점에서 인물화상경에서의 '사마'가 무령왕이라는 추론은 재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도 인물화상경에서 '사마'가 무령왕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이 학자의 경우 [[김현구]] 교수처럼 무령왕의 동생이 [[케이타이 덴노]]라고 추정하지는 않았다. 최근에는 [[칠지도]]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주목받은 홍성화 교수 또한 사마를 무령왕으로 해석했는데, 그의 경우 남제왕(男弟王)을 [[동성왕]]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일본서기》에는 [[부레츠 덴노]]가 죽고 후사가 없어서 적당한 사람을 찾다가 아버지가 16대 [[오진 덴노]]의 5대손이고, 어머니가 11대 [[스이닌 덴노]]의 7대손인 [[케이타이 덴노|케이타이]]를 옹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케이타이 덴노의 아버지의 5대조로 되어 있는 16대 오진 덴노는 제2왕조의 대왕('오오키미')이었고, 어머니의 7대조로 되어 있는 11대 스이닌 덴노는 제1왕조의 대왕이었다. 따라서 일부 학계에서는 케이타이 덴노의 출신이 불분명하므로 그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모를 이전 두 왕조 대왕들의 자손으로 하는 계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일본서기]]》의 기사에서는 《[[백제본기]]》를 인용하여 [[천황]]과 황자 및 태자가 한꺼번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그 당시 반란이 일어난 뒤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기록이 말살되었기 때문에 백제 사서의 기록을 차용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당시에 [[백제]]와 [[야마토|왜]] 두 국가 사이의 거리가 가까웠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물화상경을 주고받았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케이타이 덴노의 '케이타이'라는 말 자체가 새로이 왕조를 계승했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무령왕이 '남동생 왕'이라고 칭한 일본 천황이 케이타이 덴노가 틀림없다면 '''케이타이 덴노야말로 행방을 알 수 없는 곤지의 세 아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90~191 >"만약에 이 사마가 정말로 백제의 무령왕이라고 한다면 계체, 등극하기 전의 [[케이타이 덴노|계체]]와 백제의 무령왕이 이미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요. 그렇다고 한다면 무령왕의 재위기간 그리고 계체천황의 재위기간 동안에 왜 이렇게 두 인물이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고 백제와 왜 왕권의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지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겠습니다." >---- >권오영 서울대 교수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이 [[케이타이 덴노|계체]](継体) 입니다. 근데 그 계체(継体)는 왕이 되기 전에 일본의 변두리에 작은 세력의 우두머리에 불과했어요. 근데 그 인물이 전체 일본의 왕이 되는 데에는 백제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어요. 그래서 스다하치만 신사에 거울이 모셔져 있는데, 일본 국보입니다. 저기 글씨가 씌여져 있어요. (중략) 이 거울에 나와있는 내용이 한일 학계의 수수께끼에요. 근데 분명한 것은 오호도(男弟)라는 인물은 계체(継体)가 왕이 되기 전 본명이에요. 사마는 무령왕의 본명이고... 그래서 케이타이가 왕이 되기 전에 무령왕과의 관계를 갖는 것이에요. >---- >권오영 서울대 교수, [[차이나는 클라스]] 2020년 6월 방영분 중 결국 이를 무령왕과 관련지으려면 이 유물이 [[백제]]와 정치적으로 완전히 구분된 [[일본]] 열도 내 정권의 유물임을 인정해야 하며, 이것이 [[고고학]]과 문헌을 통해 드러나는 국제 정세와도 들어맞는다는 주장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명문에 의문점이 남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호도노 오키미(男弟王)'가 오시사카궁(意柴沙加宮)에 있었다고 해석하면 《[[일본서기]]》의 기록과 모순이 생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케이타이 덴노는 [[부레츠 덴노]]가 폭정을 일삼던 [[키나이]] 지역이 아닌 [[에치젠]]에 머물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본서기》의 기년 오차를 근거로 503년에 이미 케이타이 덴노가 즉위했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통치자로 보이는 대왕과 케이타이 덴노여야 할 '오호도노 오키미'가 일단 다르게 표기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기년 조정을 하더라도 《일본서기》의 기술과 완전히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오시사카노오나카츠히메(忍坂大中姬)'라는 [[황후]]가 있었던 [[인교 덴노]] 시기를 《[[송서]]》 〈왜국전〉에 맞추어 443년 전후로 가정하고, 443년에 이 거울이 제작되었으며 사마의 혈통은 불명확하나 왜계 신료였을 것이라 보는 의견도 있으며[* 예를 들어 〈[[진구 황후]]기〉에서도 '시마 노 스쿠네(斯麻宿禰)'가 등장하는데, '스쿠네'는 카바네(姓)이므로 '시마(斯麻)'가 이름이다.] 이것이 503년설에 못지 않게 유력한 가설이다.[* 물론 503년 설을 취하더라도 사마를 일본의 신료로 보는 데는 모순이 없다.] 게다가 아무리 [[외국인]]이라고 해도, 적성국도 아닌 [[동맹국]]의 왕을 존칭도 없이 그냥 쓰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다. 《[[일본서기]]》에서도 백제 부여씨 [[왕족]]이나 [[귀족]]들은 거의 꼬박꼬박 관등이나 존칭을 붙여준다. [[한국]]에서는 무령왕과 어떻게든 관련짓는 것이 잘 팔리기 때문에 503년설만 [[TV]]와 [[언론]]에 노출되는 경향이 있으나, 443년설을 취할 경우 무령왕은 태어나기도 전이므로 당연히 이 명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왜의 신료가 왜의 [[왕자]]인 [[오진 덴노]]의 손자를 위해 바친 물건이라는 설을 택하더라도, [[백제]]에서 건너간 물건이 아니라는 주장을 할 때 논거로 사용한 칭호나 관례가 깡그리 누락되었다는 점을 똑같이 적용해서 반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동생[弟]'은 다소 무례한 칭호가 될 수 있는데, [[왜국]]의 '사마'라고 불리는 신료가 443년에 당대에 통용되던 호칭을 놔두고 구태여 '동생'이라고 부르며 왜국의 왕자에게 헌상했다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다. 게다가 [[와카야마현]]은 고대부터 백제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지역으로, [[무령왕릉]] 관에 사용된 목재가 이 와카야마현에서 자생하는 금송으로 밝혀졌다는 점을 근거로 무령왕이 사여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덧붙여 이 명문에서 '남제왕(男弟王)'의 정확한 판독이 사실 '부제왕(孚弟王)'이라는 설, 일반적으로는 '10일'로 판독하는 '일십(日十)'과 '[[대왕]](大王)'을 이어붙여 '일십대왕(日十大王)' 또는 '왈십대왕(曰十大王)'으로 해석하여 특정한 [[천황|덴노]]의 이름과 맞추는 설이나 '일하(日下)'를 '초(草)'의 간자로 보아 5세기 중반의 인물인 오쿠사카 황자(大草香 皇子)에 대응시키는 설 등 여러 가설이 대립하여 아직 이 명문에 대해서는 일관된 의견이 없는 상태이다. 요약하자면 해당 인물화상경은 무령왕과 [[왜국]] 간의 외교와 관계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사료의 존재와 상관없이 무령왕이 왜국과의 [[동맹]] 관계를 이용해서 이득을 취했던 기민한 인물이었음이 《[[일본서기]]》를 통해 분명히 확인되므로, 만약 503년 무령왕설을 취한다면 이를 설명할 때 쓸 수 있는 자료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진짜 왜국의 신료가 제조한 [[거울#s-2.1|청동거울]]이라면, 일본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금석문]] 가운데 이나라야마 철검명[* [[사이타마]]에서 발굴되었으며, 5세기 중반에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과 함께 일본이 자체적으로 만든 제일 오래된 유물 중 하나로서 일본에서도 그 무렵부터 한자를 대대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일단 [[일본]] 학계에서도 화상경은 [[백제]]의 무령왕이 보낸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유력한 학설이지만, 남제왕(男弟王)에 대한 표현은 의견이 분분하다. 대체적으로는 무령왕과 [[게이타이 덴노]]의 관계가 청동거울을 주고 받을 정도로 돈독했다는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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