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기대여법 (문단 편집) === 중화민국 === [[중화민국 국민정부|중화민국]]은 우선순위에서 밀린 탓에 소련이 110억 달러, 영국이 330억 달러 어치의 물자를 받는 동안 10억 달러도 못 받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국민혁명군|국부군]]이 처한 열악한 상황과 내부에 만연한 심각한 부정부패, 이에 대한 연합군 수뇌부의 불만과 불신 등으로 지원을 의심받기도 하였다. 일단 [[중일전쟁]] 개전 초의 국부군 정예병력은 독일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는 이 시기 아직 [[일본]]과 동맹을 맺지 않은 나치 독일이 대량의 무기를 수출하고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같은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고문관들까지 파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이 일본과 동맹을 맺으면서 고문관들이 철수하고, 30개 사단 중 8개만 무장이 완료되었고 나머지는 편제에 맞게 구식 무기들로 채웠는데, 그나마 이 8개도 포병, 공병, 화학 장비와 군마, 차량이 부족했다고 한다.[* 여기에 장교와 하사관들의 평균 숙련도와 같은 무형적 자산까지 감안할 정도 중국 측 자체 평가로도 전시 편제의 일본군 상비사단 1개에 대항하기 위해선 개편사 5개가 있어야 한다고 봤다.] 이들조차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다량의 병력과 장비를 상실한 국민당군은 그 이후로 미국의 지원에 큰 기대를 걸었다. 반면 미국 입장에서 중국은 아직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선이었고 영국과 소련을 지원하기도 바쁜데 중국을 지원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일본이 중국의 주요 해안을 장악하고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한 이후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루트가, [[미얀마|영국령 버마]]가 일본에 함락당한 이후로 버마 루트까지 끊기면서 물자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기껏 가능한 게 당시의 [[인도 제국|영국령 인도]]에서 [[티베트]] 상공을 통한 수송이었다. B-29의 초기 작전의 상당수 소티가 폭격임무가 아닌 중국을 향한 무기 수송에 할당되었다. 폭탄 적재창에 폭탄 대신 구호품/군수품을 적재한 것. 또한 중국에 배치된 미군부대(주로 공군)에 대한 군수품 수송에도 할당했다. 이러한 항공 수송으로 전차를 비롯한 중화기를 주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기술적으로 수십 톤짜리의 [[주력 전차]]를 공군의 전략 수송기로 실어나를 수 있게 된 것도 베트남 전쟁 이후이고, 그것도 1회에 고작 1-2대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총기나 야포류나 조금 줄 수 있었고 그나마도 사고가 많아서 다 주지도 못했다. 대표적으로 [[에베레스트 산]]으로 인식되는 [[티베트 고원]]의 첩첩산중의 험악했던 수천 m의 산들과 악명 높은 계절환경에서 많은 불시착이 발생했다고 한다. 덕분에 이 지역은 전후에 버뮤다 삼각지대에 버금가는 미스테리 지역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이집트]] 방위를 위해 낼름 가로채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기껏 지원 온 무기들도 [[조지프 스틸웰]]이나 [[클레어 셰놀트]]를 비롯한 미국인들이 독점했지 정작 장제스는 총 한자루 받아보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 중 셰놀트는 장제스와 매우 원만한 관계였고 중국군에 협조적이었지만, 스틸웰이 문제였다. 그는 중국군 전체에 대한 통수권을 넘기라는 분에 넘치는 요구를 하고 심지어 중국의 내정에까지 간섭하며 시종일관 장제스에게 잔소리나 해대며 떽떽거리던 무능한 양반이었다. 스틸웰과 그의 군사고문단은 중일전쟁의 양상이나 중국군의 전술[* '''후방 유격전''' 및 일본군의 공세에 맞선 '''후퇴 후 분산포위 전술'''을 말한다. 우선 유격전은 거대한 일본 점령지의 후방에서 소모전을 강요하고 일본이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분산후퇴-분산포위 전술은 보급이 빈약한 일본군을 공세종말점으로 이끌어내는 동시에, 분산된 병력을 한시에 일거에 집중시켜 포위망 안에 들어온 일본군을 사방에서 두들겨대는 전술이었다. 일본군의 상대적으로 막강한 화력에 중국군 전체가 녹아내리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는 당시 중국군이 4년간의 전쟁을 통해 수립했던 효과적인 노하우였고, 반신불수가 된 중국이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의 전술이었다. 그러나 병력의 집중운용과 정면 공격 등의 정석적 교리를 중시했던 스틸웰의 미 군사고문단은 중국군이 이러한 전술을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열등한 쿨리들이 기본도 모르고 내빼기만 한다고 폄하하기 바빴다. 결국 이토록 오만한 모습을 보이던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중일전쟁 당시의 국민혁명군의 전술과 똑같은 전술을 구사한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수백 킬로미터를 후퇴하는 대굴욕을 당한다.] 및 적인 일본군의 능력은 무조건 폄하하면서 보급받은 것을 자기 휘하 부대에 꿍쳐놓고 버마 탈환 준비에나 힘썼다. 이 때문에 열받은 장제스는 미국의 지원이 적은 것은 근본적인 이유가 스틸웰 때문이라고 잡아 비난하면서 가뜩이나 좋지 않던 둘의 사이는 더 나빠진다. 그나마 인도에 주둔한 중국군은 꽤 풍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약간의 M4 셔먼과 스튜어트 전차 100대로 무장할 수 있었지만 [[일본군]] 수백 만이 주둔한 중국 본토의 사정은 가히 절망적으로, 가뜩이나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스틸웰의 버마 공략 지원을 위해서 없는 물자와 병력을 차출해야 했다. 게다가 미국의 정치계에선 감리교도인 장제스 부부와 쑹메이링의 로비 때문에 친중파가 꽤 생겨난 반면에 미군 안에서는 국부군을 싸우지도 않는 군대로 얕보고 경멸하는 시각이 퍼져 있어서 국민당을 왜 지원해줘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가득했다. 스틸웰 등의 미국 장교들은 "국민당은 왜 방어전, 소모전에만 일관하고 왜 대규모 야전을 하지 않는가, 국민당이 1937년부터 1941년까지 벌였다는 분투는 국민당의 거짓말이다"라고 중국을 깔보았는데 이들의 편견 때문에 중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 우선순위는 자꾸 밀리게 된다. 게다가 자존심 강한 장제스와 미국/영국은 자꾸 충돌을 거듭하면서 양측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그나마 중국에 호의적인 편이었던 미국 정치계에서조차 반중 감정이 퍼지면서 상태는 심각해졌다. 게다가 스틸웰의 대표적 실책인 [[대륙타통작전]]에서 중국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니미츠]]의 [[대만 섬|대만]] 공격론이 쑥 들어가 중국을 지원해야 할 전략적인 이유마저 없어지게 된다. 그나마 버마가 탈환되고 무능하고 오만방자한 스틸웰을 대신하여 성격이 부드럽고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앨버트 웨드마이어]]가 부임한 이후로 상태가 꽤 나아져서 중국군은 전보다 더 많은 지원을 받아 전열을 회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셔먼 전차를 비롯해서 미국식 무기로 무장한 국민당 정예부대들은 중국 남부를 겨냥한 일본군 10만 대군의 공세에 맞서 일본군 3만명을 저세상에 보냈다. 이후 미국은 나치를 패망시키고 나서 조지 패튼을 비롯한 미국의 장군들과 지상군 파견을 비롯한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했으나 그 전에 일본이 원자탄과 소련군 웨이브를 맞고 백기를 들면서 실행에 옮겨지진 않았다. 한편 공산당에 대한 지원 떡밥도 나온 바가 있었는데 [[마오쩌둥]]은 오랫동안 장제스 대신에 자신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싶어했고 미국 특사들을 [[옌안]]에 초청하여 그들을 구워삶아 미국이 중국에서의 대화 파트너를 장제스에서 자신으로 교체하려는 로비를 벌였다. 마오쩌둥은 항일에 거의 힘을 쏟지 않으면서 정작 장제스는 항일을 도외시한다는 [[프로파간다]]를 퍼뜨렸고, 국민당은 부패하고 무기력하지만 공산당이 지배하는 옌안은 민주적이고 활기차다는 식의 이미지를 구축하여 미국인들을 꾀려 했다. 스틸웰도 자기 말 안 듣는 장제스를 압박하기 위해 공산당에게도 무기를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장제스를 약올렸는데 이 때문에 장제스와 스틸웰의 사이는 더욱 틀어졌고 결국 해임당할 처지가 된 스틸웰은 공산당 지원을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장제스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후임인 [[앨버트 웨드마이어]]는 공산당이 중국의 유일한 정권인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을 흔드는 일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취함으로써 공산당에 대한 지원은 완전히 물건너갔다. 정작 국민당이 엄청난 양의 지원을 받은 것은 중일전쟁이 끝난 후로, [[해리 S 트루먼|트루먼]] 행정부는 40~60억 달러에 달하는 지원을 국민당에게 해주지만 전후 피해를 복구하고 질서를 회복하는데 실패한 국민당이 민심을 잃은데다 장제스가 파멸적인 만주 진공 작전을 수립하면서 [[국공내전]]의 패배의 단초를 제공함에 따라 장제스에게 쥐어졌던 상당량의 미제 무기들은 국공내전에 좀 사용되다가 국민당의 전열이 붕괴되면서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넘어갔다. 이들 물자의 일부는 [[6.25 전쟁]]에 투입되어 미군을 향해 불을 뿜기도 했다. 심지어 [[베트민]]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지원받은 베트민의 [[바주카포]], 박격포, 무반동총을 상대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