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기대여법 (문단 편집) === 영국 === 무기대여법에 따른 지원을 최대로 받은 국가는 다름 아닌 [[영국]]이다. 무기대여법 전체 추산 액수인 약 500억 달러 중 영국([[영연방]] 전체)은 313억 달러(전체 액수의 60%) 가량을 받았다. 영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지상 병기뿐만 아니라 군함을 많이 얻어갔는데, 세계 곳곳에 있는 식민지로부터 자원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군함의 가격은 다른 무기 체계와 비교를 할 수 없을 만큼 비싸서 돈은 더 나간 건 덤. 당시 영국의 육군의 상태는 전황과 개발 모두 말이 아니어서 영국 육군은 무기대여법의 영향으로 사실상 대부분의 [[전차]]가 [[M4 셔먼]]으로 통일되다시피 했다. 전황에선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의 여파로 가뜩이나 경제가 빌빌거렸는데 프랑스에 장비, 병력 대부분을 지원하며 전선을 프랑스까지로만 한정시키려 했지만, 프랑스가 일찍 망하는 바람에 물자와 병기들을 죄다 프랑스에 두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겨우 몸만 성히 빠져나왔다. '''이 결과로 영국 본토 내에서 제대로 무장시킬 수 있는 사단 수가 꼴랑 2개 사단이었다.''' 조잡한 [[스텐 기관단총]]이 나온 이유가 이렇게 무기가 더욱 더 급하게 필요해진 영국의 상황 때문이었다. 개발 면에선 [[보병전차#s-2|보병전차]]와 [[순항전차]]로 이원화된 전차 개발 구조의 문제에다가 및 그 결과물도 상황에 쫓겨서 급조하는 등 영 신통치 않아서 자원을 허투루 낭비한 일이 많았다. 단단한 보병전차는 장갑 면에선 그나마 쓸 만했으나, 전쟁 초기 주력 대전차포인 [[2파운더]]는 초기에 고폭탄을 만들지 않아서 대보병 능력이 개판이었고, 있던 철갑탄에는 작약이 없어서 살상력이 크게 떨어졌다. [[6파운더]]는 그나마 상황이 양호했으나 전황의 악화와 처칠의 명령으로 배치가 지연되었고[* 영연방 캐나다에서 [[램 전차]]를 만들 당시 6파운더를 주포로 삼으려 했으나 이 명령 때문에 2파운더를 달게 생기자 개발을 미루다가 처칠의 수정으로 6파운더가 통과됐을 때 바로 내놨다. 처칠의 실책 중 하나.] 결국엔 미국의 [[75mm 전차포 M2–M6|75mm M3 전차포]]를 가지고 [[QF 75mm|새로 주포]]를 만들었다. 기동전으로 승부해야 할 순항전차는 개발에 삽질에 삽질을 연속으로 해서[* 대실패 그 자체였던 [[커버넌터 전차|순항전차 Mk.V 커버넌터]]는 조종수가 가만히 있어도 화상을 입었을 정도로 비전투 손실 염려가 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즈음에 투입된 '''8번째''' 순항전차인 [[센토어 전차]], [[크롬웰 전차]]부터 그나마 전차 구실을 할 정도로 쓸만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나 셔먼과 울버린보다는 이 센토어 전차와 크롬웰 전차도 어디까지나 쓸 만하다는 수준이라 미국과 달리 수송 용량을 확대해 더 무겁고 두껍다는 건 아니었다.[* 이를 기반으로 차체를 연장해 17파운더를 장비한 [[A30 챌린저]]는 그 평이 좋지 않았다.] 물론 영국의 기술력도 출중하였으므로 셔먼 전차나 [[M10 울버린]] 대전차 자주포를 자국에 맞게 개조한 [[셔먼 파이어플라이]]나 [[M10 울버린#s-4|M10 아킬레스]]도 많이 개조해서 전쟁에 보탰다. 이렇게 자국 전차 개발 중 결함과 독일군 폭격으로 줄어든 자국 생산량 때문에 방해없이 꾸역꾸역 생산하는 미국제[* 미국 [[크라이슬러]]사 소유 디트로이트 아스날 공장은 1940~45년 동안 전차 총 2만 2345대를 뽑아냈다. 이 생산량은 2차 대전 중 영국과 독일이 자국 산업을 총 동원해 만든 전차 댓수 2만 4803대, 2만 4360대에 근접했다.[[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worldoftanks&no=2941745&page=1|#]] 미국의 전차 공장 중 단 한 곳에서만! 미국이 2차 대전 중 생산한 전차 수는 약 8만 8400대였다. 여기서부터 전세계가 미국과 국력 차가 얼마나 나는지 알 수 있다.] 전차를 쓰기가 더 나아서 무지막지하게 구입했다. 얼마나 많이 썼는지 그 증거로 미국이 가지고 있던 전차의 이름은 [[스튜어트 전차]]부터 시작으로 [[영국군]]이 많이 지어 줬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찌하랴. 이 외에 전차 개발에선 미국과 콜라보를 많이 하여 [[T14]]나 [[A33 엑셀시어|엑셀시어]] 같이 궤도를 공유하는 것을 개발하지만 중전차라는 체계가 이 두 나라에선 운송에 불합리해 결국엔 나가리가 되었고 추가로 순항전차 외 개발에 주력한거라곤 [[T28]]을 모티브한 [[A39 토터스]]지만 범용성이 극도로 떨어지는 초중전차라서 결국 전황에 하등 쓸모가 없었다. 대전차 주포라면 몰라도 [[자주포]] 면에선 '''부진한 전차 개발보다 더더욱 삽질의 연속'''이라 [[25파운더]] 곡사포를 역시나 결함 있던 보병전차 [[밸런타인 전차]] 차대에 얹은 [[비숍 자주포]] 같은 망작만 만들다가 영연방의 캐나다가 만든 미국의 M3 리 전차를 기반으로 만든 M4A5 [[램 전차]]를 개조해서 만든 [[섹스턴 자주포]]만이 영연방의 성공작이었다. 아프리카에서 그 느린 보병전차 [[발렌타인 전차]]를 개조한 비숍 자주포를 쓰다가 미국으로부터 명품 [[M7 프리스트]]를 받자마자 전부 다 갈아치우고 전쟁 내내 M7을 썼다. 물론 [[105mm]]를 쓰는 M7의 탄환이 영연방과 호환되지 않으므로 더욱 더 돈이 나갔다. 여기에 영국은 미국이 155mm 이상을 쓰는 자주포들을 실전배치한 것에 비해 자국 곡사포 중에서 [[25파운더]]를 넘는 구경의 대구경 자주포를 개발, 배치하는데 모두 실패했다. 화포에선 전차에 쓰이는 포의 고폭탄이 타국보다 위력이 심각할 정도로 낮았는데, 이는 영국제 화포들이 타국보다 고관통에만 올인하다보니 작약량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대전기 주력인 17파운더는 같은 구경인 3인치 주포에 비해서 관통력은 월등하나 포탄이 포압을 견디기 위해 작약량이 그 절반이라서 대보병 능력이 떨어졌으며 이게 문제가 된 사례로는 [[한국전쟁]] 때 캐나다 제25보병여단이 대보병을 위해 [[M10 울버린|M10 아킬레스]]를 버리고 M4A3(76)W HVSS를 재수령한 것도 그 이유가 작용했다. 이것 때문에 미국의 3인치 포를 수령 및 개조하여 처칠, 크롬웰에 장착하여서 대보병 화력을 키울 수 밖에 없었다.[* 전쟁 후 여기에 연장선으로 영국은 당장 쓸 120mm 전차포가 없었기에 영국의 120mm의 시작은 미국의 [[120mm M1 대공포]]를 사옴으로써 시작했을 정도로 주류 연합국 중 포탄 구경 키우는 데 인색했고, 17파운더 대타로 나온 [[20파운더]] 또한 미제 90mm 포보다 관통력과 중거리 명중룰은 좋으나 그 놈의 83.4mm라는 점과 포압 + 작약 문제가 또 발생해 고폭탄 화력은 또 밀렸다. 그 후 정신을 차려 만들어진 [[로열 오드넌스 L7]]은 고폭탄 화력까지 잡으면서 서방권 표준 전차포로 자리 잡았다.] 영국 해군도 사정은 마찬가지라서 개전 당시 대서양과 지중해, 태평양 3개 전선에서 활동하느라 전력이 분산되어 함선 수가 부족한데 대서양 전투로 유보트의 위협까지 받자 미국에게 [[평갑판형 구축함|구식 구축함]] 50척을 지원해 달라는 것을 시작으로 수십 척의 호위 항공모함 및 호위 구축함을 지원받았다.[* 이 구축함들중 9척을 제외한 대부분은 영국이 선단보호 및 대잠초계 임무에 투입하였다. 9척은 캐나다 해군에 재공여되었다. 캐나다는 이 구축함들을 매우 애지중지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주력함인 [[전함]]과 [[항공모함]]도 영국 본국의 수리 및 건조시설이 부족해 대규모 개장이나 수리를 해야 할 지경에 이르면 미국까지 가서 수리 및 개조를 받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또, 식량 자원을 엄청나게 많이 공급받았는데, 바닷바람이 불고 날 좀 풀렸다 싶으면 비가 오는 영국 본토 사정상 자국내 생산량으로는 [[감자]] 외 식량 자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국의 식량지원이 소련보다 더 절실했다. 덕분에 [[영국 요리]]는 말 그대로 스팸처럼 쏟아지는 [[스팸]]이 지배하는 상황에 놓였으며, 영국에서 생산하는 각종 통조림이나 전투식량도 상당수가 미제 완제품, 그렇지 않더라도 미국에서 들여온 원재료를 영국에서 가공처리한 것일 정도였다. 오늘날 불필요한 메일을 일컫는 '[[스팸메일]]'이 [[스팸(몬티 파이튼의 비행 서커스)|이런 스팸만 먹던 영국의 사정]]에서 나온 말이고, 그 유명한 [[피시 앤드 칩스|피시 앤 칩스]]를 생선 대신 스팸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이러한 무기, 식량 지원의 대가로 영국은 레이더 기술, [[VT 신관]], 전투기 엔진 설계도 등의 최신 기술들과 카리브 해 지역의 주요 해군 기지들, 카리브 해 제해권을 미국에 넘겨줬다. 미국의 국력으로 첨단 장비들을 대량생산하여 수상기, 폭격기 등에 붙여서 대잠초계기를 만들었고 [[U보트]]로부터 제해권을 되찾아오는데 성공하긴 했다. 전후 영국의 자존심 때문에 2000년대까지 프리깃 한두 척을 상시 마약 등의 밀수 단속 임무차 카리브 해에 초계함으로 배치해 두고 있었지만 현재는 철수시키고 [[미국 해안경비대]]에 넘겨 버렸다. 물론 영국이 받아먹기만 하지는 않아서 영국이 소련에 제공한 물자도 무시할 수준은 못 된다. 영국은 소련에게 전차 5천 대 이상과 대전차포 5천 문 이상, [[호커 허리케인]] 3천 대,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1100대를 포함하여 항공기 7천 대 이상을 지원해 주었다. 여기에는 대전기 그 어떤 독일기와도 대등 이상으로 싸울 수 있는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Mk.IX도 포함되었다. 그 외에도 군화 1500만 켤레와 전함 1척을 포함한 해군 함정, 소나와 레이더 2천 세트 등을 총 3억 8백만 파운드에 식량과 재료로 1억 2천만 파운드로 약 4억 3천만 파운드를 제공하였다. 당시 환율을 이용하여 달러로 환산하면 17억 2천만 달러로 적지만, 본인들도 얻어먹는 처지에 미국이 준 양의 16%를 준 것이다. 게다가 항공기의 경우는 질적으로도 우수했다. 물론 독소전의 환경은 저공에서 싸우는 일이 많기도 했고 소련의 지형에서 굴리기는 불편했던지라 미국의 [[P-39 에어라코브라]]가 활약하는데 그쳤다.[* [[Bf 109]]가 독소전을 치르면서 소련 지형에 맞게 랜딩기어 등을 손봐서 적응했던 반면 영국 입장에서는 스핏파이어에 굳이 그런 개량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소련 입장에서는 운용하기 편한 기체는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