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묘호 (문단 편집) == 개요 == [youtube(lCuNMvzzy9g)] 묘호([[廟]][[號]], Temple name)는 [[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이다. [[중국사]]의 [[주나라]]에서 유래된 [[유교]]식 왕실 예법으로(이전 [[왕조]]인 [[상나라]]에서도 사용한 기록이 있다), [[중화제국]]과 [[한국]], [[베트남]]에서 사용되었다. [[천자]]의 영(靈)을 [[태묘]](太廟)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되는 [[이름]]이다. >천자는 칠묘제 종묘를 쓰고 공덕이 클 시 묘호를 올린다. >---- >[[예기]] 새롭게 즉위한 천자가 [[붕어#s-2|붕어]]한 천자에게 '○조(祖)' 또는 '○종(宗)'이란 형식으로 묘호를 지어 올린다. 묘호에 붙는 한자는 [[시호]]의 뜻을 정하는 [[시법]]을 따르며, '공덕이 클 시'라는 문구 때문에 [[당(통일왕조)|당]] 이전까진 [[창업군주]]이거나 소수의 아주 위대한 천자에게만 올렸다. 그 외에는 [[경제(전한)|경제]]처럼 이전까지 죽은 황제를 부르는 명칭은 묘호가 아닌 [[시호#s-1|시호]]였다. 심지어 묘호가 이미 올려진 황제를 두고도 신하들이 '묘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여 기존의 묘호를 폐지한 경우까지 있을 정도로 원칙에 충실했다. 실제로 한나라의 역대 황제들 중에는 묘호가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훨씬 더 많고, 묘호를 받았다가 폐지당한 사람도 꽤 있다. 그래서 [[삼국시대]], [[남북국시대]]까지 한국 왕조들도 모든 [[임금]]이 아닌 일부 임금에게만 묘호를 올렸다. 대표적인 예가 [[태종 무열왕]]이다. 하지만 [[측천무후]]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의 [[존호]](살아있는 황제의 호칭)를 거창하게 지었고, 이게 전통으로 남았다. 측천무후의 [[손자]]인 [[당현종|현종]] 때부터 '생각해보니 이러면 자신의 조상들이 초라해지는 것 같다'는 이유로 이전 황제들의 시호에도 온갖 미사여구를 덕지덕지 붙여버렸다. 이러다보니 시호가 점자 길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송나라]]에 이르러서는 수십 글자씩 붙는 경우도 생겨 호칭으로 부르기에는 곤란해졌다. 때문에 당 이후부터는 모든 황제에게 묘호를 붙였으며, 묘호를 약칭으로 황제를 부르게 되었다. [[명나라]]와 [[청나라]]는 [[일세일원제]] 즉 황제 한 명당 연호 하나만 사용하는 제도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묘호보다는 군주의 약칭으로 살아있는 황제 본인에게도 사용 가능한 [[연호]]+제로 불렀다. 이는 공식적인 이름이라기보다는 통칭의 개념에 가깝고, 공식적으로 선대 황제를 지칭할 때는 연호보다는 주로 묘호나 시호로 지칭했다. 가령 명실록은 [[명나라]]의 5대 황제를 '선종 장황제(宣宗章皇帝)'로 지칭하지, 연호에서 따온 통칭인 [[선덕제]]라 지칭하지 않는다. [[만력제]]·[[강희제]] 등의 명칭에서 '만력'과 '강희'는 각각 당대 중국에서 실제로 사용하던 연호이다. [[원나라]]까지는 원래는 한 황제의 치세에 연호가 자주 바뀌어서 시호 혹은 묘호로 호칭했지만, 명·청 시대부터는 [[정통제]]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1황제 1연호의 원칙이 지켜졌는지라 연호로 임의의 황제를 지칭할 수 있었다. 정통제만 [[토목의 변]]으로 인해 오이라트에 인질로 잡혀가자 조정에서 급하게 동생인 [[주기옥]]을 황제로 옹립했다가, 나중에 탈문의 변으로 다시 복위해 '천순'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사용해서 '영종'이라는 묘호로만 불리는 편이다. 어째서인지 [[숭덕제]]도 연호보다는 묘호인 '태종'이 더욱 익숙하다. 그런데 이 때문인지 한국에서는 묘호는 제후국의 칭호이고 '연호+제'만이 황제의 호칭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특히 [[한국사]]에서는 [[고려]] 이후 대부분의 군주가 ○조, ○종 등의 묘호를 사용하고, [[대한제국]]에 와서야 [[고종(대한제국)|태황제]], [[순종(대한제국)|효황제]] 등으로 부른다는 점과 맞물린 듯하다. 즉 연호나 묘호는 천자국의 전유물로, '연호+제'보다 격이 낮은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대한제국이 직접적으로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이는 이미지라 생기는 인식이고 조 및 종도 원칙적으로는 왕보다 더 높은 호칭이다. 묘호는 원칙적으로는 천자국 전용 칭호였기 때문에, 극복 불가능한 덩치를 가진 중국의 명분적 우위를 인정하던 전근대 동아시아 구도상 한국사에서 사용한 묘호 대부분은 [[외왕내제]]의 일환으로 중국 몰래 사용한 것이다. 즉 [[태조(조선)|이성계]]가 조선 국내에서는 태조였지만,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에서는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9018_001|강헌왕(康獻王)]]이라는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로만 칭했다. ○○왕·○○공 등의 [[시호]]는 제후왕이나 신하에게도 내려지지만, 묘호는 천자, 즉 황제의 태묘(廟)에 올라간 이에게만 붙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어떠했는가를 평가하는 시호와 달리 묘호는 '천자'로서 행적을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 따라서 제후왕 또한 '황제의 신하'로서 묘호를 사용할 수 없다. 그렇기에 설령 한국 왕조가 유교를 받아들여 예법을 따른다 해도 오묘제를 사용하고 중국 왕조에서 시호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천자국이 아니니까. [[고려]]와 조선이 묘호를 사용한 것은 중국 몰래 사용한 것이며, 이는 [[대월]]국 황제를 칭한 베트남의 역대 왕조도 동일하다. 중국이 보고 지적을 하든 말든 대놓고 묘호를 쓴 것은 [[신라]] [[신문왕]]과 [[대한제국]] 둘뿐이다. 전자는 [[나당전쟁]]에서 [[당나라]]를 싸워서 격퇴한 후 자신감이 붙어있었기 때문에 당이 태종 무열왕의 [[http://db.history.go.kr/id/sy_001r_0020_0360_0220|태종 묘호에 태클을 걸어도]] 공공연히 거절하며 당당한 외교적 자세를 표출하던 시기이고, 후자는 19세기 말 [[청나라]]가 [[아편전쟁]]·[[태평천국의 난]]·[[청일전쟁]] 등으로 쇠약해지자 아예 황제국을 선포한 마당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비슷하지만 다른 호칭으로 [[능호]]가 있는데, 종묘에서 사용하는 호칭인 묘호와는 달리 이 능호는 무덤 자체의 이름이다. 다만 능호도 묘호처럼 거기 묻힌 군주를 가리키는 호칭으로도 사용했다. 가령 "[[한명회]]는 [[광릉]]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란 표현은 광릉이란 무덤의 덕을 보았다는 게 아니라 광릉에 묻힌 [[세조(조선)|세조]]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표현이다. [[광해군]]이나 [[연산군]]처럼 폐위된 후 복권되지 않은 군주의 신위는 종묘에 없기 때문에 묘호가 없다. 보통 망국의 군주는 태묘에 모셔질 일이 없으므로, 굳이 후대 왕조에서 공식적으로 묘호를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고 비교적 간략한 시호 정도만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령 [[당애제]]는 후당 명종 시기에 경종(景宗)의 묘호와 소선광렬효황제(昭宣光烈孝皇帝)의 시호를 올리는 것이 제안되었으나 시호만 채택되었을 뿐, 묘호는 태묘에 모시지 않았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원순제]]의 경우에도 명나라에서는 따로 묘호를 올리지 않고 순황제(順皇帝)라는 시호만 내렸다. 다만 [[북원]]에서는 혜종(惠宗)이라는 묘호를 공식적으로 올렸다. 참고로 묘호, 시호 등은 동아시아권에서만 있기에 나머지 국가에서는 이름이 겹칠 경우 ~세로 구분하며 특별한 특징이 있다면 별칭을 붙인다. 예를 들어 대머리왕 샤를 1세, 승리왕 샤를 7세, 오귀스트 필리프 2세 등...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