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목화 (문단 편집) === 국내 === [[고려]] 시절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이것을 가지고 온 것으로 유명했지만, 2010년 [[백제]] 시대의 면직물이 출토되면서 목화 도입의 원조를 내놓아야 할 판이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목화는 온난하고 건조한 기후인 [[인도]]의 고원지대가 원산지인 만큼 장마와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의 기후와는 잘 맞지 않아 극소수만 재배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런 희소성으로 인해 그 용도 또한 높으신 분들의 사치품이나 의례용으로 사용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당장 면직물 유물이 출토된 곳을 보면 절터란 걸 확인할 수 있다. 왕실이나 귀족의 원찰이었다면 의례용으로 사용되었을 확률이 상당히 높아지는 것. 그리고 백제 이후로도 삼국사기 색복지를 보면 [[통일신라]] 중기 사람들의 복식으로 [[견직물]], [[삼베]], 소[[가죽]] 등이 주로 언급되고 있으므로 문익점 이전에 면직물이 존재했다 쳐도 그다지 대중적이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동북아시아]] 기후에 맞게 개량된 퍼진 [[중국]]제 종자를 들여와 서민 계층에 대중화한 것은 여전히 문익점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공로 덕분인지 조선 시대에는 공신으로 꼽혔다.[* 문익점은 고위직에 집안 빵빵한, 흔히 말하는 권문세족 출신이기 때문에 목화 같은 거 신경 안 써도 그냥 먹고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여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고, [[조식(조선)|남명 조식]]은 그 정신을 높게 평가하여 '삼우당문공묘사기'를 짓기도 하였다.] 다만 위인전에 나오는 것처럼 '''붓두껍에 숨겨서 목숨 걸고 가져온 것은 아니다'''. 문익점의 목화와 관련해서 3대 거짓 정보가 있는데, '중국의 강남으로 3년간 유배', '붓두껍', 그리고 '목화는 수출 금지 품목'이 그것이다. 이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후손들이 점점 부풀린 케이스. 세종, 세조실록에서도 이 이야기는 많이 인용되고 있으니 전형적으로 성공한 사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서 강남 드립이라거나, 조선 건국에 부정적이라서 폄하당했다거나 하는 것이 왜 의미없는 이야기인지는 [[문익점]] 문서를 참고. 여담으로 [[비단]]을 중국이 독점하기 위해 누에의 밀반출을 금한 적이 있는데, [[동로마 제국]]의 사신이 위의 일화처럼 지팡이 같은 곳에 누에 알을 숨겨서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가 누에 재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목화 씨 밀반입 일화의 모티브가 되었을 거라 추측할 수 있다. 둘 다 직물 원료이기도 하고... 목화의 전래가 기존의 삼베옷보다 백성을 따뜻하게 해준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화로 만드는 [[면(섬유)|무명]]천은 비쌌고, 조선시대에는 이 무명천으로 [[화폐]]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평통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조선의 [[기축통화]]나 다름 없었다.[* 지금도 지폐는 이름과 달리 대부분 면섬유로 만든다.] 그러니 일반 평민들은 겨울나기 옷 몇벌을 가지는 정도가 일반적이었고 [[설빔]]이라 해서 새해 첫날에 옷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던것도 옷을 짜내는것이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옷을 시장에서 사입는것도 부담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화학솜 및 수입 목화와의 경쟁에 밀려 '''오늘날 한국산 목화는 산업용 수준으론 거의 생산되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한국의 목화 농업은 조선 시대 때 일본에 수출까지 했었을 정도[* 일본 면화는 한 때 전적으로 조선에서의 수입량에 의존했으나 [[무로마치 막부]] 말기에 미카와에서 재배에 성공하여 점점 수입 물량을 줄였다.]로 기반이 있었고, 개화기 때 수입 목화가 들어오면서 한 번 타격을 받았으나 전쟁 물자 확보를 위한 [[남면북양]] 정책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일제강점기]]까지는 계속 성장해 나갔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당시 섬유 공업이 가장 발달해 있던 수도권이 초토화되고, 이후 [[미국]]의 원조로 대량의 미국산 원면이 들어오면서 사실상 목화 농업은 끝났다. 다만 목화 재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유기농 목화솜을 찾는 수요 때문에 소량으로 목화를 재배하는 농가들이 남아 있다. 혹시라도 자기 집에 옛날 어머님이 혼수품으로 가져온 진짜 한국산 목화솜 이불 같은 게 있다면, 다시 구하기 힘든 물건이니 알아서 잘쓰자. 목화 솜은 오래 되면 뭉치기 때문에, 80년대만 해도 동네마다 이것을 얇게 떠서 풀어 주는 솜틀집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여기서 솜을 조금씩 빼돌리는 게 뉴스에 나왔다. 이런 이불을 덮던 사람들은 화학솜은 덮는 느낌이 안 나서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에는 재래시장에서 몇 곳이 잔존하는 형태. 이런 솜틀집에서 솜을 푼다고 손님들이 맡긴 이불에서 진짜 솜을 빼고 더러운 쓰레기 솜을 넣는 행위가 시사프로에 나오기도 했다. 구식 목화솜 이불의 경우 매우 두꺼워서 한겨울에도 덮기 힘들 때가 있는데, 이를 재활용해서 좀 더 얇은 봄/가을용 이불로 나눠 만들기도 한다. [[조선]]의 [[영조]]가 왕비를 뽑는 시험을 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모두 [[장미]], [[모란]] 같은 꽃을 언급할 때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가 '''백성을 따뜻하게 하는 목화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대답해서 왕비로 채택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목화가 지력 소모가 심한 작물이라 농민들의 고생이 심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사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