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목지국 (문단 편집) === 쇠락 ===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에 기록된 것을 보면 [[한성백제]]도 초기엔 목지국이 주도하는 마한 지역에 있는 일개 거수국이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나 상술한대로 [[진한]]의 실력이 만만찮았던데다 가뜩이나 [[고구려]]의 성장을 주목하고 있던 삼국시대 [[위나라]]가 [[마한]]의 위험성을 인지하게 되자 상황은 크게 변하게 된다. [[관구검]]이 [[동천왕]]의 고구려를 크게 쳐부수어 강원도 동부 일대 경로를 확보하게 된데다 그 시점부터 한동안 고구려는 신경쓸 것 없게 된 위나라가 별안간 [[마한왕]]의 무역 독점권을 인정하지 않고 이제 [[진한]]과 직거래를 트면서 진한을 거의 마한과 같게 대우하겠다고 통보한 것. 이 말인즉슨 마한과 [[마한왕]](=목지국 거수=삼한의 명목상 맹주)이 삼한 지역에서 차지하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이러한 조치로 가장 심하게 이익을 침해당하는 건 [[신분활국]](신분고국)을 비롯한 [[임진강]] 유역의 마한 소국들이었으나, 목지국을 비롯한 마한 지배 세력 입장에서도 크게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기리영 전투]] 문서도 참조. 이 전투 결과 경기도 동부, 황해도, 강원도 서부에 소재한 적지 않은 마한 소국들이 목지국을 등지고 위나라에게 충성하게 되었으며, 진한과의 직거래 루트 또한 이로 인해 완전히 뚫려 마한의 대중국 외교 및 무역 독점권은 실질적으로 부정되고 만다. 이러니 기원후 246년 이후 어느 시점에서 목지국의 위상은 수직낙하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목지국도 패배는 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위나라에게 꽤 큰 타격을 입혔던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도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 동안 국세를 회복하게 된다. 이보다 수백 년 전 마한 맹주국 건마국은 서한에게 아무 것도 못해본 것과 비교해보다면, 마한 일대와 목지국의 실력이 적어도 그동안 꽤 성장했다고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물론 위나라가 서한에 비해선 당연히 국력이 약했던데다 그마저도 일부는 동오, 촉한, 북방 야만족 등에게 늘 할애해야만 했음 또한 참조해야 하지만] 그러나 문제는 '''백제국이 목지국에게 틈을 내주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발생했던 한반도 중부의 권력 공백을 백제국이 치고 들어온 것이다. 다만 목지국이라고 가만 있던 건 아니었다. 이후 백제국과 상대한 거의 한 세대에 가까운 격렬한 투쟁에서 보이듯 적어도 목지국이 위치한 천안 및 그 근처 청원, 홍성, 보은, 아산, 괴산, 옥천, 충주, 진천 등에 있었던 마한 거수국들은 모두, 목지국과 한편이 되면서 백제와의 마찰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지국은 백제국의 성장을 막아내지 못하면서 결국 백제에게 무릎 꿇고 만다. 사실 전쟁 초기부터 국력 차이는 꽤 있었던 걸로 보인다. 백제와 본격적인 개전 당시 목지국 친위 세력은 기껏해야 충청도 약 절반 정도에 그마저도 대부분 산악 내륙 지역이었던 반면, 목지국에게 3세기 중후반에 기습적으로 전쟁을 걸은 [[고이왕]] 때 백제국은 경기도 전체를 직접 지배화한 건 물론 충청도도 이미 서부 절반 지역은 침투가 완료된 상태였다. 또한 상술한 임진강 유역 및 강원도 서부 및 경기도 동부의 마한 소국들은 하나하나 백제에게 쓰러져 직접 지배령화되어가고 있었는데, [[위나라]]의 [[낙랑군]], [[대방군]] 등은 본국인 위나라가 [[촉한]], [[동오]]랑 한창 전쟁하고 있고, [[서진]]으로 통일된 이후에도 각종 난들이 발생하며 나라 자체가 내부적으로 개판인데다 북방민족과 고구려 견제 등에도 힘을 써야 했기에 이 과정에서 백제군까지 제대로 상대할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백제는 적어도 3세기 중반 ~ 4세기 초반까지 무려 반 세기 동안 북방은 거의 신경쓰지 않고 목지국 계열 세력에게 전력을 투사할 여건이 마련된다. 게다가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반백제 연합에서 중심이 되어주었어야 할 목지국 자체가 3세기 중후반 [[책계왕]] 무렵 기습적으로 본거지인 [[청당동]]을 함락당하면서 무력화된 건 정말 큰 타격이었다. 즉 '''앞장서서 싸워줘야 할 우두머리가 기습 한 방에 쓰러진 상황에서 싸움이 시작된 모양새'''인데, 이러니 목지국 잔여 세력이 백제에게 제대로 저항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결국 [[비류왕]] 재위기에 해당하는 4세기 중반에 [[충청북도]] [[청주시]]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용원리의 백제 제휴 세력이 성장하는 것과 비례해서, 천안 청당동 잔여 세력은 완전히 퇴락하여 없어지는 걸로 나타난다. [[고고학]]적으로는 3세기 후반~4세기 초반 즈음 백제의 직접 지배령의 진격이 충청도 북동부에서 갑자기 멈추면서 오히려 충청도 서부와 전라도 서부를 타며 내려가는 양상이 나타나는데, 목지국 및 목지국 추종 세력과의 저항 추이와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걸 보면 목지국이 맹주 자격을 잃은 후에도 그 일대가 직간접적으로 열심히 저항했음이 짐작되는 부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