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목종(고려) (문단 편집) == 생애 == ||||||<:><#f9d537>'''{{{#670000 고려의 역대 개령군}}}'''|| ||<:><#f9d537>'''{{{#670000 대수}}}'''||<:><#f9d537>'''{{{#670000 작호}}}'''||<:><#f9d537>'''{{{#670000 이름}}}'''|| ||<:><#f9d537>'''{{{#670000 초대}}}'''||<(> 정윤(正胤) 개령군(開寧君) ||<(> [[왕치|왕치(王治)]] || ||<:><#f9d537>'''{{{#670000 2대}}}'''||<(> '''개령군(開寧君)''' ||<(> '''왕송(王誦)''' || >성종 재위 9년(990년) 12월, 교(敎)하다. > >"[[주나라|주(周)]]가 [[동성제후|인적]](麟趾)[* 기린의 친족, 즉 왕실의 일원들을 의미.]들을 봉(封)하여 번병(藩屛)[* 제후국의 별칭. 한국사에선 고구려계 [[보덕국]]이 [[신라]]의 번병을 자처했다.]을 예우해준 것과 한(漢)이 제후를 봉한 제(制)는 종지(宗支)[* 역시 왕실을 의미.]를 의(義)로써 대하기 위함이다. > >그리하여 대명(大命)[* 임금의 천명(天命).]을 사방(四方)에 펼쳐 본지(本支)[* 국가, 왕조의 다른 말.]를 백세(百世)동안 전했다. 나(予) 또한 성공한 전례를 당연히 따를 것이다. > >숭덕궁(崇德宮)[* 목종의 어머니인 [[헌애왕후]]의 관저.]의 적남(嫡男) 송(誦)은, 태조영손(太祖令孫)이자 과인(寡人)의 유자(猶子)[* [[조카]]를 의미하는 고대 한자어.]이다. > >어려서부터 바름(正)을 길러냈고 빼어난 재주를 가졌다. 덕을 키우는데 있어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니 이미 성인의 그릇(成人之器)을 가졌다. > >옛 일을 떠올리고 되뇌이니 친족을 아끼는 것은 백세(百世)의 양규(良規)이고 어린 친족을 보다듬는 것은 5상(五常)의 아지(雅旨)이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감히 소봉(疏封)[* 봉토(봉)를 내려줌(소).]함을 아낄 수 있겠는가? 곧 아름다움을 펼칠 것이라 믿고 오늘을 시작으로 은혜를 내리겠다. > >'''지금 공관어사(工官御事) 지도성사(知都省事) [[박양유]](朴良柔)와 사부전중감(使副殿中監) 조광(趙光) 등을 보내 지절(持節)과 예(禮)를 갖추어 널(爾) 개령군(開寧君)으로 책봉한다.''' > >나라를 자신의 집으로 삼고 효(孝)를 바꾸어 충(忠)으로 삼으라. 군신(君臣)을 부자(父子)의 규범으로 대하고 위엄과 의례를 잃지 말라. 예(禮), 악(樂), 시(詩), 서(書)의 가르침을 배우고 열심히 살라. > >사치해지지 말고 주색을 탐하지 말라. 씨앗을 심고 거두는 것의 어려움을 알고 조정을 보조해야 한다. > >'''존경하라! 진중하라! 내 명령을 저버리지 말라.'''" >---- >《[[고려사]]》 <[[성종(고려)|성종]] 세가> 중 발췌. -[[서경(고려)|서경]] [[장락궁|본궐]]에서 후계자를 공인하다.- 왕송은 [[경종(고려)|경종]](제5대) 재위 5년 차에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 경종이 1년만에 붕어해버린 탓에 어머니 헌애왕후 황보씨와 함께 숭덕궁에서 살게 되었다. 왕송은 10세가 되던 날에 재위 중이던 삼촌 [[성종(고려)|성종]](제6대)을 따라 서도(西都)[* 지금의 [[평양시]].]에 행차했다. 성종은 [[장락궁]]에 도착한 뒤, 자신의 조카인 왕송에게 한 때 본인의 봉호였던 '''개령군'''(開寧君)을 물려주어 그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봉지로 하사된 개령은 현(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김천]]이다. 성종이 서경에서 후계자를 공인한 것처럼 [[예종(고려)|예종]](제16대)도 서경에서 [[인종(고려)|인종]](제17대)을 태자로 삼으려 했지만 [[김인존]]이 반대하여 개경에서 했다고 한다. [[현화사비]] 기록에는 993년, 목종이 13살 때 [[헌정왕후]]가 [[붕어]](崩御)하자 성종은 '''잠룡'''(潛龍)[* [[현화사비]] 원문 기록.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상태]인 목종을 시켜 제사를 대리하게 했다. 아마 동생의 제사를 통해 2대 개령군의 입지를 다져 놓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왕송은 삼사청(三司廳)[* [[삼사(관청)|삼사]] 부서의 관사. 삼사는 정부의 재정을 담당했다.] 안에 빈소를 차리고 제궁빈비(諸宮嬪妃)[* 고려는 후비나 여성 왕족들에게 [[궁호|궁(宮), 전(殿), 원(院)]]을 하사하여 [[작위]]로 봉했다. 그래서 '제궁의 비빈들'이라 한 것이다.]와 문·호 양반(文虎兩班)[* 조정의 문신과 무신들. 원문 기록으로 제2대 [[혜종(고려)|혜종]]의 이름 '무'(武)를 [[피휘]]했다.]을 이끌고 금봉문(金鳳門)[* 발해 [[상경성]]과 조선 [[경복궁]]에도 금봉문이 있었다.] 앞에서 발상(發喪)했다고 하며, 5년 뒤에 17살의 보령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