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목종(고려) (문단 편집) == [[시호]], [[묘호]], [[능호]] == 목종은 고려 왕사에서 첫 번째로 [[시해]]당한 왕이다. 그를 시해한 [[강조(고려)|강조]]는 죽은 군주의 묘호를 '''민종'''(愍宗), 시호를 '''선령대왕'''(宣靈大王)이라 했다. 이어 능호를 '''공릉'''(恭陵)이라 짓고, 자기 맘대로 [[태묘]]에 올렸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처음 [[강조(고려)|강조]]가 올린 묘호, 시호, 능호는 영 좋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묘호 민종(愍宗)의 '민'([[愍]])은 '근심할 민' 자였다. 그러나 묘호는 기본적으로 찬양의 의미를 담은 한자를 쓰기 때문에 '민'이라는 단어는 전혀 좋은 묘호가 아니었다. '민'(愍)은 시법상으로는 동정이나 위로에 가까운 의미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군주의 시호로 사용하게 된다면 보통 불행한 삶을 살거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경우에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단 악시는 아니지만, 찬양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시호였던 '선령'(宣靈)은 '베풀 선([[宣]])' 자까지는 좋았다. 근데 뒤의 '령'([[靈]]) 자는 [[시법]] 항목에도 나오듯 '''[[후한]] 말기 최악의 [[암군]]'''이었던 [[영제(후한)|영제]] 등 나약한 군주에게 주어졌던 시호였기에 강조는 묘호와 시호 모두 좋지 않게 올린 것이었다. 능호마저 공릉(恭陵), 공손하다 할 때의 '공'([[恭]])으로 그다지 좋지 않은 능호였다. 후계자 [[현종(고려)|현종]]이 고쳐 올린 묘호는 '''목종'''(穆宗), 시호는 '''선양대왕'''(宣讓大王)이었다. 묘호는 나름 괜찮은 한자였다. 시호가 의미심장한데 앞의 '베풀 선'(宣) 자는 유지했지만 뒤 '령'(靈) 자를 '사양할 양'([[讓]]) 자로 바꾸었다. 즉, '''"목종이 현종에게 양위했다."'''는 의미의 시호인 것이다. 강조 때문에 어정쩡한 상태로 즉위하게 된 현종의 고심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이후 시호가 계속 추봉되어 공식 [[존호]]는 '''목종'''(穆宗) '''정공극영위혜효사선양대왕'''(靖恭克英威惠孝思宣讓大王). 능호도 '''의로울 의'''(義) 자를 써서 '''의릉'''(義陵)으로 바꾸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