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목종(고려) (문단 편집) == 기타 == * [[한국사]]에서 명시적으로 기록된 첫 번째 [[게이]] 임금이다. 세계사를 통틀어 [[양성애자]] 성향으로 추측되는 군주들은 많으나, 목종의 경우 [[동성애자]] 성향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낸 군주 중 하나이다. 목종 이전 [[신라]] 제36대 [[혜공왕]]도 "본래 여자로 태어나야 했으나 상제에게 부탁하여 억지로 남자로 태어나게 한 탓에 행동이 여성스러웠다"는 설이 적혀 있으나 《[[삼국유사]]》 자체가 [[불교]] 설화적 [[뉘앙스]]가 짙은 기록이고, 시녀들과 어울려 여성의 놀이를 좋아하고 여성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기록들은 있어도 구체적으로 남성과 성관계를 했다는 암시 등의 동성애 성향은 서술되지 않았다. 신라 혜공왕의 경우, 기록대로라면 동성애자라기보다 [[트랜스여성]] 내지 굳이 성애적으로 봐도 [[양성애자]]로 볼 수 있다. 목종 이후 동성애 관련 언급이 알려진 왕은 원 간섭기 [[충선왕]](제26대)인데 그는 한 명의 남자 애인과 다수의 여자 애인을 거느린 [[양성애자]]였다. 제31대 [[공민왕]]도 이런 언급이 있긴 하나 공민왕 이후 《고려사》 기록이 조선 왕조의 개국 과정에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한 <[[우창비왕설]]>을 아예 사전에 깔고 서술되어 있는 지라, 목종, 충선왕의 사례와 달리 오늘날에는 공민왕의 피를 이은 자식이 없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조선 건국 세력들이 곡필했거나 과장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 목종은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에게는 도통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아내도 [[선정왕후]](宣正王后) 유씨 1명[* 물론 [[첩]]이지만 요석택 궁인 김씨도 있기는 하다.] 뿐이었거니와 슬하에 자식도 없었으며 이 때문인지 젊은 [[나이]]에 후사를 걱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 그는 왕으로 있는 동안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사내들을 곁에 끼고 살다시피했다. 《[[고려사]]》 <유행간 열전>에서는 '목종은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였던 유행간을 매우 아껴서 용양(龍陽)의 관계까지 맺었다'고 했는데 여기서 '''용양'''이란 소위 남색(男色, 동성연애)을 했다는 의미이다.[* [[용양지총]]이라고 하여, [[전국시대]] 위왕의 총애를 받던 [[용양군]]의 군호에서 따왔다.] 이후 유행간은 목종의 측근이 되어 별다른 공이나 재주가 없으면서도 합문사인이라는 높은 [[벼슬]]에 올라 목종의 곁에서 정사를 좌지우지했는데 성품이 오만해서 신하들을 깔봤으며, 고개와 눈짓으로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유행간이 소개[* 가끔 "유충정이 [[신체]]가 뛰어난 탓에 유행간의 소개를 받아 목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 돌아다니고 있으나 [[사료(역사)|사료]]적인 근거는 없다.]한 [[발해]] [[유민]] 출신인 유충정 역시 목종의 총애를 받아서 유행간과 더불어 측근으로 활동했는데 유충정 또한 동성 연인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은 있지만 유행간과는 달리 목종과 유충정이 동성애를 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유행간은 [[강조의 정변]] 이후, 국정을 농단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으나 유충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불확실한데 목종이 [[궁궐]]에서 도망쳐 나올 때 유충정이 옆에서 보좌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유충정을 목종과 유행간을 죽일 때 같이 죽였다고 썼지만 《고려사》 원문에는 '유행간 등 7명을 죽였다'(殺行簡等七人)라고만 했지, 유충정도 죽였다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목종이 죽고 20여 년 뒤인 1030년 [[발해부흥운동]] 세력인 [[흥료국]]에서 고려에 지원을 부탁할 때 유충정의 이름이 다시 언급되는데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름이 [[한자]]까지 같다. 유충정이란 동명이인은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한국]]의 주요 [[역사서]]를 통틀어 더이상 나오지 않을 정도라서 흔한 이름이라고 보기 힘들다. 또 발해계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목종의 실각 이후, 발해 [[땅]]으로 가서 발해부흥운동에 몸 담았을 여지도 있다. * 고려 역사상 처음이자 공식적으로 신하에 의해 폐위되고 시해당한 [[군주]]이다. 제2대 [[혜종(고려)|혜종]]이나 제3대 [[정종(고려 3대)|정종]]도 시해당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기록상으로는 목종이 최초 사례다. * [[태조(고려)|태조 왕건]] 사후 제4대 [[광종(고려)|광종]]에게서 이어진 광종계 왕통의 마지막 [[국왕]]이다. 이후 고려 왕은 제34대 [[공양왕]]까지 전부가 [[안종(고려)|안종 왕욱]]의 혈통이다. 참고로 고려 초기의 [[족내혼]]으로 인해 목종은 친가, 외가, 처가가 모두 태조의 직계 [[후손]]이다. 아버지 [[경종(고려)|경종]]은 태조의 친손자이자 외손자이며, 어머니 [[헌애왕후]] 황보씨도 태조의 친손녀이자 외손녀이다. 게다가 이는 부인 [[선정왕후]]도 비슷한데 선정왕후의 아버지는 태조의 아들 수명태자의 아들 홍덕원군이었으며, 어머니는 태조의 아들 광종의 딸 [[문덕왕후]]였다. 누구인지 불분명한 선정왕후의 친조모를 제외해도 그녀의 조부, 외조부, 외조모 모두가 태조의 후손이다. 결과적으로 목종의 조부, 조모, 외조부, 외조모, 아버지, 어머니, 장인, 장모가 모두 태조의 자식이자 손자들인 셈. 고려의 왕 중에서 이 정도로 막강하게 태조의 핏줄을 타고 난 왕은 없다. 그러나 정작 목종 본인은 폐위당하고 시해당한 점은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 한국사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제주도]]의 [[한라산]]이 분화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002년 6월에는 5일간의 분화가 있었고, 1007년에는 1주일간 분화가 일어나 산이 솟아 올랐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을 끝으로 한라산은 분화 기록이 없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간간히 [[지진]] 기록이 나오는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한때 [[휴화산]]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4년부터는 한라산 내부에 [[마그마]]방이 여러 개 존재하는 것이 확인되면서 다시 [[활화산]]으로 지정해 관리에 들어가고 있다. >5년([[1002년]]) 6월. 탐라산(耽羅山) 네 곳에 구멍이 나면서 붉은 물이 솟아나더니 닷새만에 그쳤으며 그 물은 모두 와석(瓦石)이 되었다. >10년([[1007년]]) 탐라(耽羅 : 지금의 제주도)에 상서로운 산이 바다 가운데서 솟아났기에 태학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 살펴보게 했더니 탐라(耽羅)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산이 처음 솟아나올 때에 구름과 안개로 어두컴컴했으며 땅이 진동하여 우레가 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레 밤낮 만에야 비로소 걷히니 산의 높이는 백장(丈)이 넘고 둘레는 40리(里)가 넘었으며 초목은 없고 연기가 그 위를 덮고 있어 바라보면 석류황(石硫黃)과 같기에 사람들이 두려운 나머지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 >전공지(田拱之)가 직접 산 아래까지 가서 그 모습을 그려서 바쳤다. >---- >'''《[[고려사]]》 권55, <지>제9, -오행-(五行)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72834&categoryId=49630&cid=49617|'산붕']]'''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