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목종(고려) (문단 편집) ==== 민생 정책 ==== 즉위하자마자 국내 산천의 신령들에게 모두 훈호를 붙였다. 불교가 도입된지 오래되었으나 토착 신앙도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이는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조치로 추측된다. 행차가 지난 주와 현은 1년치의 전조(田租)[* [[토지세]]]를 감면했다. 군주의 행차가 지나가는 지역은 여러가지 준비를 해야 돼서 힘들었다. 흔히 군주가 [[사냥]]을 자주 나가면 백성들이 힘들어했다는 이유도 같은 이유이다. '''중국사 최악의 [[폭군]]'''이었던 [[양제(수)|수 양제]]의 경우, 그가 행차했던 지역에는 죽은 이들이 널렸다고 하며, 청 고종 [[건륭제]] 또한 할아버지 성조 [[강희제]]에 비해 여러 지역을 행차하며 지나치게 경비를 쓴 것에 대한 비판이 있다. 1006년 흉년이 들자 백성들의 조세와 공물을 탕감하고, 창고의 곡식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빌려주었다. [[경주시|경주]] 사람 융대(融大)가 보낸 노비들을 사실 양민인 줄 알면서도 받은 평장사 한인경(韓藺卿)과 이부시랑(吏部侍郞) 김낙(金諾)을 유배보내고, 마찬가지로 노비를 받은 궁인(宮人) 김씨(金氏)에게는 [[구리]] 100근으로 벌금을 내게 하니 많은 사람들이 이를 듣고 경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