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목욕 (문단 편집) === 유럽 === 의외로 생활의 한 형태로 정착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반은 맞고 반은 오해다. [[고대 그리스]] 때는 [[온천]]에서 목욕 문화가 생겼다. [[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86|기사]]. 목욕을 자주 하면 건강에 좋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목욕은 일반 석재나 대리석을 사용해 만든 탕에 따듯한 [[물]]을 담고, 그 안에 들어가 [[시녀]]가 몸을 닦아주고, 목욕이 끝났다면 젖은 몸의 물기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고, 뽀송해진 몸에 [[기름]]을 발라줬다. 손님이 목욕을 한다면 시녀 또는 주인집의 딸이 입욕보조원 역할을 했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0311751128|기사]].[* [[암흑시대#s-2.1]]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호메로스]] 서사시에도 욕조에 물을 데워 목욕하는 묘사가 여러 번 나오는데, 역시 여성이 목욕을 도와주고 목욕 후에는 몸에 [[기름]]을 바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특히 [[오디세이아]]에서는 온수 목욕이야말로 문명의 혜택인 것으로 표현된다.] [[스파르타]]의 열기욕도 유행했는데 증기탕에서 땀구멍을 열어 노폐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찬물에 몸을 담그는 것으로 끝맺었다고 한다. 목욕을 하면서 몸과 함께 마음도 닦는다는 인식이 있어 전 그리스에 유행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 최초의 공영 [[목욕탕|공중목욕탕]]은 기원전 4세기경에 생겼는데, 원래 강이나 바다에서 목욕하던 [[고대 로마]]인들은 이를 보고 그리스식 목욕에 매료되어 그리스식 목욕탕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https://weekly.donga.com/List/3/all/11/67634/1|기사]]. 또한 신체를 단련할 수 있으며 젊은 청년들의 교육을 담당한 시설인 체육관이 생기게 되자, 자연스레 [[땀]]을 씻을 수 있는 [[목욕탕]]도 같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https://www.reportworld.co.kr/paper-doc/p780406|링크]].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할 때 [[욕조]]에 들어가자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비중의 개념을 깨달아 알몸으로 뛰어가며 εὕρηκα(대중적으로 [[유레카]]라고 알려진)를 외쳤다는 말이 유명하다. [[고대 로마]]인들은 그리스식 [[목욕탕]]을 만들기 전에는 신체를 나약하게 만든다면서 [[노예]]들의 목욕을 금지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목욕 문화가 확산되면서 부유층들은 안 보이고 으슥한 곳이긴 하지만 집에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0311751128|목욕 시설]]을 갖추기 시작했고, [[http://www.newsroad.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768|수로]]가 생겨 사람들이 많은 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목욕탕|공공목욕시설]]이 부흥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에서 [[http://kalnaf.egloos.com/3395510|로마인에게 목욕은 일상]]이었고 거대한 [[목욕탕|대중목욕탕]](thermae, [[http://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67359|테르메]] 또는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1512111003151|테르마이]])은 [[황제]]가 신경쓰는 주요한 공공 시설이었다. 비유하자면 '''동네 놀이터'''라고 보면 된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심지어 [[술]]잔치에 간단한 [[식사]]까지 즐기는 곳'''이었다(…). --한국 [[찜질방]]의 원조--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8774|기사]]. 전성기 로마 제국의 목욕탕에는 [[마사지]]나 털 [[제모(미용)|제모]] 서비스 같은 것은 물론이고 식당, 운동 시설, 도서관, 상점 등 각종 시설이 있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6923885&memberNo=5235722&searchKeyword=%EB%8F%84%EC%84%9C%EA%B4%80&searchRank=27|링크]]. 이때의 목욕 방법은 먼저 뜨거운 열기욕으로 [[땀]]을 뺀 뒤, 온탕에서 몸을 뻗고 긴장을 풀어주고, 냉탕에 들어갔다 나와 몸을 문질러준다. 질병 예방 효과를 위해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드나드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심장 발작을 염려해 병약자들은 피할 것을 권했다. 목욕 뒤에는 피부 관리를 위해 [[올리브유]] 마사지가 좋다고 봤다. 이런 목욕을 하루에 2~3번 권했는데 서민 이하는 목욕을 하루에 한 번 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귀족이나 왕족만 가능했다. 귀는 [[식초]]로 닦았고, 이를 표백하기 위해 [[오줌|소변]]으로 닦았다. 다만 면도는 이발소를 따로 찾았다. [[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86|기사]]. 문제는 '''고대 로마의 목욕탕은 위생상태가 대부분 개판'''이었다는 점. 로마의 목욕탕 유적을 조사하면 거의 변소 수준으로 당대의 [[기생충]]과 병균을 찾아낼 수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목욕을 혐오했는데, 그의 기록에는 올리브유를 바른 사람이 탕에 들어가 올리브 찌꺼기가 탕에 둥둥 떠다니고, 탕 속에서 [[때]]를 밀기도 했고, '''변을 보기도 하고''', 물을 자주 갈지 않았다고 한다. 로마의 목욕탕이 더러웠다는 증거는 매우 많은데 반대로 물을 자주 갈아줬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로마의 목욕탕은 질병과 감염의 온상이었을 것이다. 자세한 건 [[목욕탕]] 문서 참고.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중세]]에 들면서도 [[동로마 제국]]에서는 여전히 목욕을 즐겼으며, [[서유럽]] 역시 과거 로마 목욕탕의 유산으로 즐겼고, [[이슬람]] 문화권에도 사람들은 계속 목욕을 하였다. 이 당시만 해도 [[성직자]]들은 "[[교회]] 오기 전에 씻고 오라"고 늘상 말했고, 목욕 자체도 부의 상징이다 보니 수차시설이 발달하면서 마을에 [[목욕탕|대중목욕탕]]이 하나씩 생겨났다. [youtube(ub1-x67Nl2g, width=630)] 하지만 [[유럽]]이 [[중세]] 후기로 접어들면서 [[목욕탕]]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던 [[매춘]]이나 [[나체|알몸]] 등이 종교적 윤리에 의해 비판받고, 결정적으로 [[흑사병]] 창궐로 공공시설에서 목욕하는 문화가 사라지게 된다.[* 비슷한 예로 [[콩키스타도르]] 침략과 함께 들어온 [[천연두]]가 [[아즈텍]] 전체에 창궐하는 매개에는 [[목욕탕|대중목욕탕]]이 있었다. 몸을 청결하게 씻으면 전염병이 줄지 않는가 싶지만, 현대처럼 소독하는 것도 아니고 깨끗하게 청소도 안 했기 때문.] 당대에는 미아즈마(Miasma), 즉 '나쁜 공기(독기)'가 병의 원인이라고 생각되었는데 그 나쁜 공기란 더럽고 뜨듯하고 물기가 많고 냄새가 역한 공기였다. 당시 목욕탕의 공기랑 정확하게 똑같다. 다만 목욕이 무조건 나쁜 것으로 취급된 것은 아니고,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학적 처방으로는 계속 살아남는다. 이렇게 목욕을 터부시하면서 나는 [[악취]]를 없애기 위해 [[유럽]]은 상류층을 중심으로 [[향수(화장품)|향수]] 문화가 발달한다. 하지만, 같은 [[유럽]]이라도 [[북유럽]]과 [[러시아]]에서는 [[사우나]] 등으로 목욕 문화가 존속되었고,[* [[사우나]]라는 용어가 [[핀란드어]]에서 유래됐다.] [[아이슬란드]]는 [[일본]]처럼 [[온천]]이 흔해서 일반인들이라도 목욕하기 수월했다. [[남유럽]]도 가까운 [[북아프리카]] 지역은 물론, [[대항해시대]]를 통해 조우하게 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및 [[아메리카]], [[아시아]]의 문화적 영향으로 인해, 목욕 문화가 그대로 살아남았다. 일례로 통일 [[스페인]] 왕국의 실질적인 시조인 [[이사벨라 1세]] 여왕의 경우, 하루에만 네 번이나 목욕을 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97px-Jacques-Louis_David_-_Marat_assassinated_-_Google_Art_Project_2.jpg|width=500]]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장폴 마라]]는 [[욕조]]에서 [[반신욕]]을 하면서 서류를 읽다가 암살당하기도 했다. 물론 장폴 마라는 본래 [[남유럽]]과 가까운 [[스위스]] 태생이긴 했다. 게다가 [[피부병]] 때문에 목욕을 자주 해야하는 체질인 것도 한몫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으로도 유명한 사건이다. 이후 19세기 초 [[산업 혁명]]의 시기에 가서, 뜨뜻하고 깨끗한 [[물]]로 씻으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경험적 지식이 퍼지자, 도시권들이 대대적으로 상수 시설을 재정비하고 [[목욕탕|공중목욕탕]]과 [[비누]]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과밀한 도시로 인해 노동자들에게서 퍼지는 전염병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가정은 매일하는 목욕이 사치였다. 당시 가정은 대부분 한 건물에 여러 가구가 북적북적 모여 사는 시스템이었고,[* 대부분 안뜰을 겸한 정사각형의 건물이나 아니면 길거리에 다닥다닥 붙은 2~3층짜리 [[타운하우스|테라스 하우스]]([[https://en.wikipedia.org/wiki/Terraced_houses_in_the_United_Kingdom|Terraced houses]]) 형태였다. 특히 [[https://blog.naver.com/yokimlove1/221658463940|백투백 주택(Back-to-back house)]]이 그렇다.] 각 가정에는 [[욕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중 특히 1875년 이전에 지어진, [[https://en.wikipedia.org/wiki/Two-up_two-down|Two-up two-down]] 형태의 집에 사는 각 가정은 욕실이 없어 부엌 싱크대에서 [[https://www.1900s.org.uk/1900s-bathtimes.htm|씻거나]], 일주일에 한 번 부엌이나 벽난로 앞에 양철 [[욕조]][* [[욕조]]는 쓰지 않으면 밖에 놔두기도 하는데 바깥에 [[https://www.1900s.org.uk/1900s-bathtimes.htm|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목욕을 하기 전 거미와 거미줄 등을 치워야 한다.]를 가져다놓은 후 거기에 물을 따로 데운 걸 부은 뒤 안에 들어가 [[비누]]로 목욕하고 남은 목욕물은 양동이에 따로 퍼서 버리고 욕조도 방에서 치워야 했다. [[http://members.madasafish.com/~cj_whitehound/Fanfic/Location_Location/Spinners_End.htm|링크]]([[https://hygall.com/388095371|일부 한글 번역]]). 이렇게 [[산업 혁명]] 시대의 노동자들은 제대로 씻지 못해서 꼬질꼬질한 몰골을 한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당시 영국의 가장 열악한 노동 계급 가정의 상황을 묘사한 글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이 노동 계급 부부는 한 방에 십수 명의 자녀들과 함께 사는데, 집안은 언제나 난로의 연기로 매캐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욕조]]가 놓여져 있었고 이 욕조에서 가장이 퇴근 후에 목욕을 했다. 아이들은 방 구석의 침구 위에서 얼기설기 누워 잠에 들었고, 식탁도 없었기 때문에 밥은 서서 먹는 일이 많았다." 이러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19세기 초엽부터 바닷물로 씻을 수 있는 [[목욕탕|대중탕]]이 [[리버풀]]의 부둣가에서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부둣가의 선원을 위한 시설에 불과했고, 현대적인 의미의 [[목욕탕|대중목욕탕]]은 키티 윌킨슨(Kitty Wilkinson)이라는 아일랜드계 이민자 여성에 의해 세워졌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질병]]의 위험에서 해방되었고, 가난한 자들이나 노동 계급도 얼마든지 더운 [[물]]로 씻을 수 있게 되었다. 단, 무료 목욕은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으로 여겨져 [[목욕탕]]에서는 몇 펜스라도 돈을 받았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1512111003151|기사]] >우리는, 전후에도 [[욕조]]에 완전히 앉지 않으면 무릎까지 차오르지 않는 [[물]]에서 목욕을 했어요. 당근을 씹으면서 달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부모님에게 전쟁 이전에 대해 말해달라고 조르죠. 그리고 그들이 말해주었던 담배 모양의 초콜릿과 통조림이 아닌 진짜 파인애플에 대해서 생각해보곤 했죠.[* [[애거서 크리스티]]의 전후 작품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자주 언급된다.] >영국 작가 수잔 쿠퍼(Susan Cooper)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이 사정은 한 때 나아지지 않았다가 [[https://www.theguardian.com/global-development/2018/nov/29/five-million-families-in-britain-living-in-houses-without-baths-archive-1960|1960년대]]부터 가정집에 [[욕실]]이 [[https://www.loveproperty.com/gallerylist/87694/what-homes-looked-like-in-the-decade-you-were-born|보급]]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에도 [[빅토리아 시대]] 시절 지어진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2006218&memberNo=24659848&vType=VERTICAL|테라스 하우스]] 건물에 계속 사는 [[달동네|빈민가]]의 극빈층은 여전히 목욕을 매일하는 것이 사치였다. [[프랑스인]]들은 현대에도 목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샤워]]도 질색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특히 오랫동안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 있는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비단 프랑스인들 뿐만 아니라 [[유럽]]인 전체가 다 그렇다고 봐도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때]]도 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때미는 문화는 전세계적으로 그렇게 보편화된 문화는 아니라서, 2010년대 후반에 서구권에서 [[한류]] 열풍이 불기 시작하고나서야 [[미국]]을 중심으로 조금씩 퍼지는 상황이다. 그 이전에 때미는 문화가 있던 나라는 한국과 [[튀르키예]] 등 몇 없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제외하면 석회암 지대가 대부분이라 생활용수가 석회수인 경우가 많기 때문. 석회 특성상 수분을 엄청나게 빨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물로 목욕이라도 했다간 피부가 뒤집어지기 십상이다. 물론, 상술했듯이, [[남유럽]]과 [[북유럽]], [[동유럽]] 및 [[독일]] 등지는 여전히 목욕 문화가 대중화된 상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