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목동신시가지아파트 (문단 편집) == 조성 == [[파일:목동과거항공사진.png|width=450]] [* 사진은 목동신시가지 북부에 해당되는 1~6단지와 [[이대목동병원]] 부근 과거 항공사진. 안양천변에 [[쪽방]]촌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 뒤로 드넓은 논밭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래의 도로는 [[국회대로]](당시 [[경인고속도로]]. 목동아파트 개발이 완료된 후 고속도로 구간에서 지정해제되었다.)] 목동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의 목동은 말 그대로 '木洞', 나무와 논밭이 많은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비가오면 [[안양천]]의 물이 넘치는 상습침수지역이었으며, [[안양천]]변에는 [[구로공단]]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쪽방]]촌을 이루며 살고있었다. 때문에 1960년대에는 [[목동(서울)|목동]], [[신정동(양천구)|신정동]]을 건너뛰고 서울 도심에서 더 멀리 떨어진 [[화곡동]], [[신월동(서울)|신월동]], [[신정동(양천구)#신정3동|신정동 서부]]가 경인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먼저 개발되어, 오히려 현재 낙후된 지역이 되어버린 [[신월동(서울)|신월동]], [[신정동(양천구)#신정3동|신정동 서부]]쪽이 도시의 모습에 가까운 인구와 주택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쉽게 말해 목동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의 목동은 '''버려진 땅'''이었다. 오죽하면 [[윤치영]]이 이곳은 안 건들겠다고 했을 정도로 서민들의 거주지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집권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서라도 당시 심각한 사회 문제였던 도시 내 주택 부족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그 일환으로 500만 호 주택 건설 사업을 내세웠다. 마침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전두환 정부로서는 [[김포국제공항]]에서 이착륙할 때, 그리고 김포공항에서 서울 중심부로 진입할 때 외국인들에게 무허가 주택과 미개발 논밭이 뻔히 다 보이는 목동을 그대로 둘 수 없어, 결국 [[안양천]]변에 높은 제방을 쌓고 목동 일대를 주택단지로 개발하게 된다. 목동은 같은 시기 같은 목적으로 개발된 [[고덕동(서울)|고덕지구]], [[개포동|개포지구]], [[상계동|상계지구]][* 이렇게 개발된 단지가 바로 [[고덕주공아파트]], [[개포주공아파트]], [[상계주공아파트]]이다. 2020년 현재 재건축 됐거나, 재건축 중이거나, 재건축 계획이 잡혀 있다. 완공 당시 거주했던 사람들은 서민이었지만 재건축이 될 즈음 이들은 땅부자가 되어 있었다(...)]처럼 서민의 주택 공급을 목표로 한 주공아파트단지와는 달리 서울과 인천을 잇는 '핵'으로서 개발할 목적이 있었다.[* 원래는 [[영등포]]와 [[부천]]이 이 역할을 해줬다. 당시 영등포는 '핵'으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많이 몰락해 있었다. 대표적으로 영등포공단이 구로공단으로 넘어가면서 인구가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5호선의 경우, 이 즈음에는 삽도 뜨지 않았다. 선유도역 쪽에 여전히 굴러가고 있는 롯데칠성음료 공장이 그 시절 흔적.] 이러한 '핵'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목동은 다른 도시개발지구에 비해 상업/행정의 중심이 되는 지역 면적을 크게 잡았다. 또한 다른 도시개발과는 달리 중심 지역을 그 지구의 최고위 간선도로를 따라 선형으로 조성되도록 도시계획을 입안했다.[* 이를 후크(Hook) 중심축이라고 하는데, 이해가 잘 안 된다면 강남을 생각하면 된다. 강남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간선도로인 강남대로와 테헤란로를 따라 상업 중심 구역이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목동은 일반적인 후크 중심축에 기반해 개발을 진행하기에는 너무 좁았고, 이에 따라 [[목동중심축도로]]를 [[일방통행]]으로 만들고 그 사이에 상업/행정 중심지역을 조성했다. 개발 과정에서 원주민들과의 마찰이 생겨 주민들이 양화교와 [[경인고속도로]]를 점거하는 등 100여 차례 시위를 벌였다. 결국 가옥주들은 최초로 무허가 주택의 재산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고, 세입자들은 10평 아파트 입주권과 가장 저렴한 이자로 이주비용을 융자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었다. 철거민들은 임대아파트 입주권과 저금리의 이주금 융자를 받는 것으로 보상 받았지만, 이를 거부한 일부는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으로 이주하여 목화연립이라는 연립주택을 조성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한국 현대 도시개발사에 있어 나름 이정표와 같은 사건인데 원주거민에 대한 보상 등과 관련하여 인간의 주거권을 어떻게 보장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처음으로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준 사건이다. 당시 철거민 권리 운동에 [[제정구]] 의원이 나선 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