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토부반도 (문단 편집) == 역사 ==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오모로[* オモロ. [[류큐 왕국]]에 전해져 내려오던 신가(神歌)들을 말한다. 17세기에 편찬이 완료된 가요집 <오모로소시>(おもろさうし)에 정리되어 있다.] 등에는 미야키센(みやきせん)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1471년 [[신숙주]]가 저술한 <해동제국기>에는 이마기시리(伊麻寄時利)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현재의 나키진손은 이 당시 모토부초 지역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구스쿠 시대]]인 1322년 경, 하네지(羽地)의 아지[* 按司, 오키나와에 존재했던 호족 또는 영주]였던 하니지(怕尼芝)가 [[나키진구스쿠]]를 함락시키고 스스로 북산왕(北山王) 에 즉위했다. 동시에 나키진을 수도로 삼으며 모토부반도는 북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곧이어 오키나와 섬 남부에 남산(南山)이 독립하면서 [[삼산시대]]가 시작되게 된다. 그러나 1416년 중산왕 [[쇼하시]]에 의해 나키진구스쿠가 함락되고 마지막 북산왕 한안지(攀安知)가 자결하면서 북산왕국은 멸망하였다. 이후 [[류큐 왕국]]은 북산감수(北山監守)라는 관직을 나키진에 두어 섬 북부를 다스렸다. 첫 북산감수는 소하시의 차남이었던 쇼츄(尚忠)[* 후일 류큐왕국의 3대 국왕이 된다.]였으며, 1469년 [[쇼엔 왕]]에 의해 제 2 쇼씨왕조가 시작되고 나서는 [[쇼신 왕]]의 삼남 나키진쵸텐(今帰仁朝典)과 그의 자손들[* 구시카와 우둔(具志川御殿)이라 불리는 방계 왕가 가문이다.]이 물려받게 되었다. 북산감수는 나키진의 아지지토(按司地頭)[* 아지 혹은 왕족이 가지는, 일정 지역을 다스리는 직위]이기도 했다. 1526년 [[쇼신 왕]]의 중앙집권 정책에 의해 류큐의 모든 아지들이 [[슈리]]에 모여살게 되었을 때에도 북산감수만큼은 예외었다. 1609년, [[사츠마 번]][* 현재 가고시마현 지역]은 류큐 침공을 감행했다. [[아마미 군도]]를 거쳐 3월 25일 오키나와 본섬에 도착한 사츠마군은 나키진의 운텐항(運天港)에 상륙, 27일에는 나키진구스쿠를 점령했다. 전투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 북산감수였던 나키진 쵸요(今帰仁朝容)가 이 즈음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저항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다만 [[가고시마현]] 쪽 기록에는 성과 마을이 비어있었다고 되어있는 모양. 이후 나키진구스쿠는 폐허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성 내부의 성소인 우타키(御嶽)에는 참배가 이어졌다. 1665년 북산감수 직위가 폐지되었으나 나키진의 아지지토 직위는 쿠시카와우둔 가문에 계속 계승되었다. 1666년 나키진의 서부 지역을 이노하(伊野波)로 분리하였다. 이노하 지역은 이듬해 모토부(本部)로 개칭된다. 1816년 영국의 함선인 리라 호(Lyra)가 방문했으며, 선장 바실 홀(Basil Hall)[* 이 항해중에 조선의 [[백령도]], [[제주도]] 등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기록도 남겼다.] 이 당시 나키진의 지토였던 나키진아지 쵸에이(今帰仁按司朝英)와 만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때에는 운텐항에 [[어뢰정]] 기지가 구축되었으며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도 전화(戰火)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일본군]] 패잔병들이 주민들을 스파이로 몰아세워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http://rekibun.jp/taiken01.html|당시 나키진 주민들의 전쟁 증언들(일본어)]] [[http://naver.me/GqOnIRke|이에섬과 모토부정 일대에서 한일 공동으로 오키나와 전투 당시의 유해 발굴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