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신나강 (문단 편집) == 역사 == [[러시아-튀르크 전쟁#제12차 전쟁 (제2차 동방전쟁, 1877-1878): 러시아 제국 승리 → 산 스테파노 조약, 베를린 회의|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크른카 M1867|크른카]], [[베르단]]과 같은 단발식 소총의 한계[* 당시 오스만 제국은 [[레버액션]]인 [[윈체스터 M1866]]을 사용하고 있었다.]를 느낀 [[러시아 제국]]은 새로운 제식소총의 설계를 공모했다. 이 공모전에서 [[벨기에]] 출신 제롬 미셸 에밀 나강(Gérome Michel Émile Nagant), 앙리 레옹 나강(Henri Léon Nagant) 형제가 내놓은 총이 테스트 결과 가장 뛰어났다.[* [[http://www.littlegun.be/arme%20belge/artisans%20identifies%20nagant/a%20nagant%20fusil%20militaire%20gb.htm|나강 형제가 설계해서 출품한 것으로 알려진 총기 사진]]] 그러나 남의 나라 사람들이 만든 총을 쓰려니 속이 뒤집힌 [[러시아인]]들은 탄창만 나강 형제의 설계를 사용했다. 당연히 개발한 소총의 탄창을 그대로 가져다 쓰자 나강 형제는 모신에게 소송을 걸었고, 결국 소송에서 이겨 소총에 자신들의 이름을 붙였고, [[나강 M1895|자신들이 개발한 권총]]을 채용하는 것으로 끝났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ergeiMosin.png|width=100%]]}}} || ||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모신]][br](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Мосин) || 총은 당시 러시아군의 무기 제조 담당 공업인 툴라 조병창의 책임자 세르게이 모신이 내놓은 설계안을 사용해 지금의 모신나강(Mosin+Nagant)이 되었다. 초기형인 M1891은 채용 당시로는 획기적인 볼트액션 장전식에 탄젠트식 [[기계식 조준기|조준기]]를 사용하여 시선을 끌었다. [[파일:attachment/EstonianM91IN1921Brit.jpg|width=400]] 그러나 총신이 [[크고 아름다운|길고 아름다운]]데다가 러시아식 스파이크 [[총검]]까지 달면 무려 173cm를 넘길 정도로 과도하게 길었다.[* 다만 사진처럼 사수의 키를 넘길 정도로 긴 소총은 당시에 타국에도 종종 있었다. 프랑스의 [[르벨 M1886]] 역시 스파이크식 총검을 착검하면 사수의 키를 넘기는 경우가 많았으며 캐나다의 스트레이트 풀 볼트액션 소총인 [[로스 소총|로스 Mk.III]] 소총도 안 그래도 길다란 전장에 총검까지 부착하면 사수의 키를 넘겼다.] 이 때문에 실전에서의 사용이 불편했고 조준기 조정이 힘들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특히 당시 러시아 공업력의 한계로 1차 대전 초기까지 외국 업체들에게 외주를 맡겨 생산해야 했는데, 설계도에 당시 보편적으로 쓰이던 인치도 미터도 아닌 '아르신(арши́н)'[* 영어로는 arshin, '야드'에 해당하는 러시아식 도량형. 1아르신 = 28인치 = 약 71cm]이라는 러시아식 도량형을 사용하여 외주를 받은 외국인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러시아 단위계의 길이 단위는 [[야드파운드법]]을 참고하여 표준화한 것이라 야드파운드법과 어느 정도 호환된다는 것이었다. 1아르신은 정확히 28인치에 대응한다. 여담으로 오늘날 지구상 독자 규격으로 유명한 [[미얀마]] 단위계도 야드파운드법과 어느 정도 호환된다(1taung = 18인치).] 또한 사용탄인 [[7.62×54mmR]]의 불량률이 상당히 높아서 전체적 평가가 썩 높지 못했다. 실제로 [[러일전쟁]]당시 [[러시아 제국군]]을 지휘하였던 [[알렉세이 쿠로팟킨]]에 따르면 모신나강의 명중률은 일본군의 [[30년식 소총]]보다 떨어졌고 이는 러시아가 [[일본군]]보다 우월한 포병 전력을 가지고도 러시아가 패배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전사자의 대부분이 포탄과 그 파편에 의한 것이었던 1차대전과 달리 러일전쟁 당시 전사자의 과반수 이상은 총상에 의한 것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러시아군의 주력 소총으로 쓰였고, [[동부전선]]에서 [[독일 제국군]] [[육군]]이 대거 노획해 제식 병기의 하나로 써먹기도 했다. 단, 탄약과 부품 등을 노획에 의존해야 했기에, 소모가 적은 [[독일 제국 해군]] 및 육군 후방 부대 위주로 지급되었다. 1차대전 후 [[소련군]]의 소요가 대거 제기되자 1930년에는 'M91 Dragoon'을 베이스로 미터법을 적용한 조준기를 채용한 M1891/30이라는 개량형이 등장했다. 여기에서 길이를 101.6cm까지 더 줄인 M1938 [[카빈]]도 나왔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4년에는 총열길이를 51.7cm까지 줄인 M1944도 출시되었고, 이후 1959년에 M1938을 기초로 한 M1891/59가 등장해 서방의 침략에 대비하여 위성국에 공여된 것이 모신나강 계열의 마지막 소총이다. 2차 대전 직전, 기계화에 박차를 가하던 [[소련군]]은 모신나강에 한계를 느끼고 후속 소총의 개발을 서두른다. 그러나 의욕작인 [[자동소총]] 시모노프 [[AVS-36]][* AVS는 7.62x54mm 탄이 자동화기에 걸맞지 않은 탄종인데다가 소련답지 않게 내부 구조가 심각하게 복잡했다. 게다가 당시 병사들의 관리소홀까지 있었으니, 실패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또한, 격발시 사수가 제어를 못하거나 '''부상까지 입는''' 상황이 발생했기에, 결국 후방으로 돌려지고 전후에는 [[AK-47|세계 최고의 살인병기]]의 등장으로 완전히 묻혀버렸다.]은 망했고 [[SVT-40|SVT-1938/40]][* 그나마 SVT 쪽은 사정이 많이 나았다. 여전히 병사들의 관리소홀 때문에 내구성을 두고 징징대곤 했지만, 무리하게 자동사격에 조정간 등을 넣으려다 실패한 AVS-36보다는 훨씬 나았다. 특히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에는 전 소련군의 1/3 수준까지 보급이 완료되었다고 하는데,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무참히 발려버린 소련군이 총을 다 잃어버렸다고 한다. 이 대부분이 독일군에 넘어가고, 소련 무기만 보면 침을 줄줄 흘리는 독일군은 제식명(Gewehr 252)까지 붙여가며 신나게 썼다고 한다.]으로 모신나강을 완전히 대체하려는 계획도 독소전의 개전에 따라 2차 대전 중에도 계속 모신나강을 주력 소총으로 쓸 수 밖에 없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ovinformburo.com/vasily_zaitsev.jpg|width=100%]]}}} || || 모신나강을 들고 있는 소련의 전설적인 저격수[br][[바실리 자이체프]] || 저격수들 또한 모신나강을 저격 소총으로서 애용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묘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항일 독립군 시절에는 애용되었던 무기지만 반대로 [[6.25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당시엔 공산군이 사용했던 적성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룡대]] 1층의 전시관에서 "[[한국 독립군|항일 독립군]] 소총"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된 잘 관리된 모신나강을 볼 수 있다. 한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선 반쯤 부서진 모습으로 북한군의 소총이나 베트콩군으로부터 노획된 총기로서 전시되어 있다. [[파일:북한군모신나강.jpg]]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한군]] 무기로 사용되었다. 6.25때 벌어진 [[고지전]]에서 북한은 다수의 저격병을 운용했는데, 많은 수의 한국군 일선 지휘관들이 북한군 저격수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따꿍총, A식 보총(아식 보총)라고 불렀다. 따꿍총이란 이름에는 총을 쏘았을 때 따꿍소리가 나서 그렇게 불렸으며, A식 보총은 '아라사(러시아)식 보병총'의 약자.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국군 모신나강.jpg|width=100%]]}}} || || 가운데 서 있는 국군 병사가 모신나강을 노획하여 메고 있다. || [[민병대]]나 [[대한민국 국군]]에서 [[노획]]해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참전용사들은 '반동이 심해서 쏘았을 때 나가떨어졌다.'고 회고한다. 의외로 [[장진호 전투]] 당시 [[미군]]도 노획해서 사용했다고 하며, 강추위에도 고장이 없어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W1g6k4x.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6.25 북한 보병부대 재현.jpg|width=100%]]}}} || || 위의 사진에 등장하는 부대는 항일무장투쟁시기 [[조선인민혁명군]]의 복장을 재현한--답시고--다고 북한측이 주장하는 열병부대원들이다. 여군들이 가진 모신나강은 길이나 모양으로 봤을때 M1938 또는 M1891/59으로 보인다. || 6.25 전쟁 당시 북한의 [[근위사단]]을 재현한 채로 행진중인 북한 병사들.[br]앞서 설명했듯이 6.25 전쟁때 북한군의 주력 소총이었다. || 현재도 2013년 드라구노프 또는 [[타부크 저격소총]]으로 추정되는 저격소총 도입 전까지 특수부대와 일반부대를 막론하고 저격장비로 운용되고있다. 2차 대전 후 등장한 [[SKS]]와 [[AK-47]]에게 [[제식 소총]]의 자리를 넘겨 주며 소련군에서 빠르게 퇴역했다. [[준군사조직]]에 전략 예비물자로 돌려지고 난 나머지 엄청난 재고는 [[중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사탕 뿌리듯 넘겨졌고 생산 시설도 거의 대부분 중국에 매각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소련군의 교리에 볼트액션 소총은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동안 저격총의 자리는 유지했지만 [[드라구노프 저격소총|드라구노프]] 등장으로 사실상 소련군에서는 완전히 퇴역했다. 이후엔 준군사조직도 AK류로 무장할 지경에 이르자 그나마 남았던 재고는 소련에서도 민수용으로 팔리기 시작했다. 다 팔고 하나 남았던 생산 라인에서 1998년까지 민간 사용 목적으로 소량이나마 계속 생산되었다. 그러니까 무려 100년 이상 계속 생산되었던 셈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모신나강/russian.jpg|width=100%]]}}} || || 체첸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사용하는 모습.[br]참고로 왼쪽의 병사가 들고있는 총은 [[드라구노프 저격소총|SVD]]의 불펍식인 SVU. || 러시아의 손을 떠난 총이 재미있는 성과를 낸 적이 있었다. 체첸 반군 [[저격수]]들이 모신나강을 사용하여 [[러시아군]]의 [[드라구노프 저격소총]]보다 우월한 명중률로 러시아군을 괴롭힌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당시 러시아의 경제적 문제 때문이었다. 드라구노프도 매우 우수한 [[지정 사수 소총]]이지만, 전용탄을 써야 좋은 명중률이 나온다는 문제점 때문이었다. [[소련 붕괴]] 이후 경제난에 시달린 러시아는 비싼 전용탄을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몇 년 간 러시아군 병사들은 일반 저가형 탄을 사용하였다. 당연히 명중률은 [[개판오분전]]. 결국 러시아군도 민간에서 징발한 모신나강으로 이에 맞섰고 그 경험으로 인해 볼트액션식 [[오르시스 T-5000]]까지 제식 채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