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사라베 (문단 편집) == 종교 == 이슬람 왕조 치하에서 모사라베들은 시편과 복음서 등을 아랍어로 번역하였으며, 이는 종종 기독교 박해가 심해질 때 지하 교회에서 예배 목적으로 활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개 이들은 이슬람 율법에 의거하여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성서의 백성]]으로 분류되어 [[지즈야]]를 납부하면 일정 수준의 권리(안전하게 생업을 지속할 권리)를 보장받았으나 비무슬림 이등 국민으로 분류되어 일상생활에서 여러가지 제약이 따랐다. 가톨릭 주교들은 운이 좋은 경우 동로마 제국 및 이웃 기독교 국가들과의 외교 사절로 활약하면서 대가로 성당을 수리 및 복구할 수 있는 예외적인 권리를 암묵적으로 보장받는 경우도 있었다. 모사라베가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는 보통 물라디[* 아랍어로 혼혈인이라는 뜻의 무왈라드에서 온 단어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흑백혼혈을 의미하는 [[물라토]]의 어원이다.]라 불렸다. 보통 무슬림 남성과 모사라베 여성 사이에 결혼에서 태어난 무슬림 아이들은 무왈라드라 칭해졌다. [[톨레도]]나 [[코르도바(스페인)|코르도바]], [[사라고사]]와 [[세비야]] 같은 도시에서는 모사라베 구역도 존재했으나, 그 수는 인구 비율에 비하면 많지 않았고 상당수가 개종하였다. 알폰소 4세에 의해 [[톨레도]]가 함락되던 당시 카스티야 측에 기록에 따르면 톨레도 주민 중에는 유대인과 무슬림만 있고 모사라베 기독교인은 없었다 한다. 중세는 보편적인 공교육, 매스미디어 같은 개념이 없고 문맹률이 높던 시대이니 만큼 농촌 지역에서는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가 다시 기독교로 개종하는 등등의 사례가 흔했다.[* 이와 비슷했던 경우로 [[오스만 제국]] 치하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알바니아인]]들도 농촌 지역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 교리를 헷갈려하고 동시에 다 믿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기독교계에서는 이혼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사라베들은 이혼을 원하는 경우 샤리아 법정에 이혼 절차를 진행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 농촌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없었던 만큼, 이런 과정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심지어 모사라베 유력자들이 [[일부다처제]] 율법을 악용하여 부인을 여럿 두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이는 다종교, 다문화사회인 나라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 [[대통령]]인 [[제이콥 주마]]의 사례처럼 [[기독교]] 신자가 현지 토속 문화를 핑계삼아서 부인을 여럿 두는 경우가 있으며, [[캐나다]]에서는 [[몰몬교]]의 [[근본주의]] 성향 분파인 [[FLDS]] 소속 [[목사]]가 교리 상 [[일부다처제]]가 허용이 된다는 핑계로 100명도 넘는 부인을 두었다가 [[중혼]] 혐의로 기소되어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슬람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서 수백년을 이어온 만큼 [[나스르 왕조]] 시기가 되면 왕조 영토 내 농촌 지역 주민들이 이미 완전히 이슬람화된 상황이었다. 중세 후반으로 가면 아랍-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 사이에 문화적 격차가 감소하고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기독교 세력이 우세해지면서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무슬림들을 모방하고 아랍어를 배우는 일이 감소하면서, 모사라베 문화는 점차 사멸하게 되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모사라베들은 이후 기독교인으로 환원되거나 [[모리스코]]의 조상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