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내기 (문단 편집) == 역사 == [[한반도]]에서 벼를 키우기 시작한 시기는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했다는 것이 유력한 설이다. [[경기도]] [[김포시]]에서는 기원전 2100년경 [[자포니카]][*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쌀]] 품종.] 볍씨가 발견되었고, [[고양시]]에서는 기원전 2300년경 자포니카 볍씨가 발견되었으며, [[충청북도]] [[청주시]]에서는 탄소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1만 3000년 ~ 1만 7000년의 고대 볍씨가 발견되었다. 벼의 원산지는 [[히말라야산맥|히말라야]] 부근이며, [[아시아]] 벼 원산지는 [[중국]] [[양쯔강]] 유역이므로 인간이 의도적으로 가져와 재배하지 않는다면 자생적으로 한반도에서 볍씨가 발견될 수 없다. 기록상으로는 [[백제]] [[다루왕]] 6년으로 서기 1세기가 최초의 기록이다. 이앙법은 [[고려]] 말기 중국에서부터 [[한국]]과 [[일본]]에 보급되었지만, 한반도는 [[조선]] 중기 이후 정착하였다.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이다. 기록상으로는 [[고려사]]의 [[공민왕]] 시대에 모내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모내기와 이앙법이 널리 퍼진 시기로는 조선 후기([[광해군]] 이후)로 보아 국사 교과서와 교재 등에 기술되어 있다. 이앙법은 모를 키우는 동안 논에 물을 대지 않고 다른 작물을 키울 수 있어(주로 겨울에 [[보리]]) [[이모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농가의 수익이 증대한다. 물로서 산소공급을 막아 잡초가 싹을 틔우지 못해 [[잡초]] 제거가 매우 쉬우며, 병충해가 적고, 벼를 고르게 심을 수 있어 생산량도 직파법보다 우수하다. 이러한 장점으로, 조선 후기 상업 발달의 원인 중 하나로 이앙법의 전국 보급이 주요 요인 중 하나라고 본다. 장점이 많은 이앙법이 고려말과 조선 중기까지 한반도에 보급되지 않았던 이유로는 기후 문제가 가장 크다. 한반도는 봄과 겨울에 강수량이 부족하며, 대부분의 강수량은 여름에 집중된다(50% ~ 60%). 그런데 모내기의 특성상 모내기를 하는 시점에 가뭄 등으로 물이 부족해서 실패할 경우 벼가 완전히 말라 죽기 때문에 '''수확량이 0이 된다.''' 이렇게 되면 조선 같이 무역도 상업도 미진한 사회에서는 '''재난급의 기근'''이 발생한다. 물론 저수지 등의 치수 사업으로 일정부분 물 부족을 해결할 수 있지만 당대의 기술과 자본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에 직파법의 경우 비가 좀 덜 오더라도 뿌리가 땅에 착근만 되면 어느 정도 수확을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조선 초기에 모내기는 '''국가에서 금지하는 농사법'''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 이후가 되면 국가에서도 모내기를 적극적으로 금지할 수가 없었다. 이 시기에는 [[면화]]·[[담배|연초]] 등 노동력이 많이 드는 밭작물들이 집중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함으로써 논농사에서 노동력을 줄일 필요성이 커졌으며, 각 지방마다 수리시설이 증가하면서 농업 여건도 개선되어 갔기 때문이다. 기록상으로는 조선 [[영조]]/[[정조(조선)|정조]] 대에 "모내기를 허가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러한 이앙법도 위도가 낮은 삼남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주로 행해졌고(조선 전체 경작지의 30%), 이보다 높은 지역에서는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중국은 강남지역에 한정해서 이루어졌으며, 일본은 위도가 높은 [[홋카이도]] 지방을 제외한 남부 전역에서 이앙법이 가능했다. 모내기는 직파법에 비해 잡초를 관리하는 노동력이 적게 들지만, 모내기 시점에는 집중적인 노동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 ~ 조선 초기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한동안 소멸했던 [[향도]]나 [[두레]] 같은 마을 공동체가 조선 후기 다시 부활하였다. 이후 이앙법이 집중적으로 한반도에 보급된 시기는 1920년대부터이다. 당시 일본은 많은 농민들의 [[이촌향도]]로 식량난에 시달린 통에 조선(남부지방)을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한다. 이때 관개배수시설의 신설 및 보수와 관리를 위해 수리조합이 대거 들어섰으며, 대규모 토목공사로 간척지를 개간하면서 [[논]]이 급격히 늘어난다. 이 시기 일본의 벼 품종도 적극 도입되었다. 품종에 대해서는 [[쌀#s-4.1|항목]] 참조. 해방 이후에도 수확과 파종, 이앙 등을 전부 수작업으로 하여 노동력 소모가 많았으나, 1980년대와 90년대부터는 모를 심을 때는 [[이앙기]], 수확을 할 때는 [[콤바인]] 등을 도입하여 많이 기계화하였다. 논과 수로를 정비하기 위해 [[굴삭기]]와 [[트랙터]]가 사용된 것은 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