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나코 (문단 편집) == 역사 == 1191년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제노바 공화국]]에게 모나코 근방의 지역을 하사해 제노바령이 되었다. 이후 1215년, 제노바가 근처의 땅들을 개척하여 무역 거점으로 개척한 곳이 바로 모나코다. 1297년, 제노바의 유력 가문인 [[그리말디 가문]]이 무력 점거했으나 바로 제노바 정부군에게 격파당하고 제노바령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집념의 그리말디 가문은 기어이 1419년에 모나코를 돈으로 구입하면서 이 지역(Rocher de Monaco)의 명목상의 영주였던 [[아라곤 왕국|아라곤]] 국왕에게 통치권까지 함께 구입해 공식적으로도 그리말디 가문의 거점이 되었다. 1612년에는 [[프린스|공]](Prince)을 자칭하였고, 1642년에는 [[프랑스 왕국]] [[프랑스 국왕|국왕]] [[루이 13세]]에게 [[공작(작위)|공작]]위를 하사받으면서 제노바령이면서도 프랑스의 보호국이라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그 이후로는 제노바 공화국의 자치령으로 남아있다가, 제노바 공화국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멸망하면서 잠시간 [[프랑스 제1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일시적으로 멸망했던 모나코 공국은 1815년에 [[나폴레옹의 몰락|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다시 부활했는데, [[빈 회의]]로 [[제노바]]와 일대 [[리구리아]]가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영토가 되면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보호령이 되었다. 그리말디 가문도 다시 복귀해 반독립적인 소규모 국가로 남아있었지만 1860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체결한 토리노 조약으로 모나코를 둘러싸고 있던 [[니스|니차 지역]]을 [[프랑스 제2제국]]에게 양도하면서 프랑스 영토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 와중에 모나코 동부의 2개 도시[* [[망통(프랑스)|멘토네]]와 로카부르나. 고작 2개 도시라고는 하지만 '''이 2개 도시가 모나코 면적의 95%를 차지했다.''']가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했는데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하기 이전부터 이 지역은 그리말디 가문의 과도한 세금 징수로 인해 불만이 쌓인 상태였고 프랑스군의 점령 이전부터 자체적으로 독립을 선언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편입을 시도하였다. 결국 반란에 질린 그리말디 가문이 1861년 410만 프랑을 받고 점령당한 2개 도시를 프랑스에 팔아치워 버렸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ontiere_Monaco.gif|width=400]] 이게 그 지도. 파란색이 팔아버린 영토, 주황 부분이 현재 모나코 영토. 이렇게 영토가 축소되어버린 이후 모나코는 [[카지노]]와 조세 피난처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전에는 [[전제군주제|전제 군주국]]이었다가 [[1910년]] [[혁명]](Monégasque Revolution)이 일어나 [[알베르 1세(모나코)|알베르 1세]]는 이에 굴복, 1911년 헌법을 채택하고 [[입헌군주제|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알베르 1세에게는 유일한 후계자 루이(나중의 [[루이 2세(모나코)|루이 2세]], 재위 1922~1949)밖에 후계자가 없었고, 이에 계승 위기가 발생하여 후대에는 나라가 프랑스에 합병될 위기에 처했다. 루이의 유일한 딸 [[샤를로트 그리말디]]는 [[사생아]]라 계승 자격이 없었는데 그 다음의 추정 후계자인 외사촌동생 [[빌헬름 폰 우라흐]]가 [[독일 제국]]의 [[슈탄데스헤어|공족]]이라 [[프랑스 제3공화국]]이 압력을 넣어 샤를로트를 루이의 후계자로 정하게 만들었다. 샤를로트는 모나코 공가에 정식으로 입적되고 발렌티누아 공작 칭호를 수여받았다. 다만 정식 혼인 관계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정통성의 약점이 있어서 샤를로트는 1944년에 본인의 계승권을 아들에게 양도하였다.[* 남편은 [[베르사이유의 장미(만화)|베르사이유의 장미]]로 유명한 폴리냑 백작부인의 후손이다. 하지만 결국 이혼했다. --명불허전 그리말디 가문--] 그렇게 해서 모나코 공위를 계승한 아들이 [[그레이스 켈리]]의 남편으로 유명한 [[레니에 3세]]다. 사실 그 이전에도 모나코에는 여성 군주가 두 명([[클로딘(모나코)|클로딘]]과 [[루이즈 이폴리트]])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계승 위기가 발생했던 전례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무렵에는 모나코 대공 [[루이 2세(모나코)|루이 2세]]는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모나코 주민의 대다수는 [[이탈리아인|이탈리아계]]였고, 프랑스는 [[비시 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에 국내에는 혼란이 많았다. [[1943년]] [[이탈리아 왕국군]]이 침공하여 모나코는 [[파시스트 이탈리아|파시스트 정권]]의 지배에 들어갔으며 [[독일 국방군|독일군]]도 주둔했다. 하지만 루이 2세의 비밀 명령을 받은 모나코 경찰들은 파시스트 정권에게 색출되기 전에 [[유대인|유대계 주민]]들에게 출국을 경고하는 등, 위험을 무릅쓴 활동을 했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몰락한 직후에는 [[나치 독일]]의 점령하에 들어가기도 했다. 루이 2세의 손자 레니에는 [[연합국]]을 지지했으며, 연합국의 승리로 모나코의 독립은 회복되었다. 1962년 10월 12일, 모나코의 면세 정책에 혹해서 수많은 프랑스 납세자들이 모나코로 몰려들어 탈세를 시도하자 열받은 드골 대통령이 모나코를 봉쇄하는 모나코 위기가 발생하였다. 이는 니콜 키드먼이 그레이스 켈리로 분했던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2014)에서 매우 극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영화에서는 드골이 당장이라도 모나코를 잿더미로 만들것처럼 무섭게 나오지만 실제론 프랑스 세무공무원 6명이 모나코-니스 도로를 막고 일일히 검문해서 세금을 징수해서 교통체증이 심해지는 수준의 봉쇄였다. 르 몽드지는 이를 두고 1962년 미국의 쿠바 봉쇄와 비교하면서 애들 장난이라고 비웃을 정도였다. 1963년에 협상이 타결되어 모나코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에 세금을 납부해야 하고 수입의 25% 이상을 모나코 바깥에서 거두는 기업 역시 프랑스에 기업세를 낸다는 합의가 체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